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삶의 향기] 울게 하소서

바람아님 2016. 6. 7. 23:46
[중앙일보] 입력 2016.06.07 00:27
기사 이미지

하태임
화가·삼육대 교수


어릴 적 나의 별명은 울보였다. 울 만한 이유는 무척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무뎌졌는지, 눈물샘이 말랐는지 웬만한 슬픈 드라마에도 어지간해선 울지 않는 여유도 가지게 됐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여러 상황이 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푹 빠져버린 공감대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감사함에, 누군가와의 시비에 휘말려 억울해서, 그리고 몸이 아파 울 수도 있다. 나는 이런 희로애락의 눈물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솟아오르는 눈물을 세 번 경험했다. 아우라(Aura) 때문이라 말해야 할까.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이 온몸을 감싸내리고 결국 뜨거운 눈물로 분출되는 경험을 겪었다.

첫 번째 경험은 10년 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다. 컬렉션은 대개 책으로 접했던 것들이라 실물을 보는 기쁨과 함께 색들의 생생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즈음 하나의 그림이 쾅 하고 감성의 문을 열어젖혔다. 수십 번이나 봤던 그림이 이성으로 꽁꽁 부여잡고 있던 감정을 건드려 버렸다. 앙리 마티스의 ‘모로코 사람들’이라는 작품인데 지금 화집에서 살펴보면 ‘나를 울린 그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색감도 단조롭고 구성도 특이할 게 없다.

두 번째는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열렸던 김환기 회고전에서 경험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만난, 존재감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은 노란 황금빛 전면 점화가 그것이다.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노란색 점들의 실루엣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환희와 섞여 잔잔하게 차오르는 눈물로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스페인 여행에서 만난 안토니오 가우디의 미완의 대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다. 네오 고딕 양식의 이 건축물은 가우디가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성당으로 만들기로 다짐했던 신념의 결과다. 성당 내부는 유기적이고 수려한 기둥들이 뻗어 있다. 마치 자연에서 위로받은 어린 시절의 안식처처럼 하늘로 높이 팔을 벌리고 있는 나무를 형상화했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가이드의 음성을 들으면서 성당 정면에서 왼쪽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찰나, 나는 빛으로 샤워하는 듯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어야 했다. 오색찬란한 빛의 커튼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의 폭포 속에서 나는 여러 이미지의 가우디를 떠올렸다. 오갈 데 없는 노동자 자녀들을 위해 손수 학교를 지어 수학과 건축, 드로잉을 가르치는 가우디. 돈이 떨어지자 수도승 같은 믿음으로 공사장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가우디. 그리고 전차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진 누추한 행색의 가우디. 사흘 후에야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좋은 병원으로 옮기려 할 때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으려 했던 가우디…. 이 모든 가우디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더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날 성가족 성당에서 흘린 감동의 눈물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들이 어떤 매개체를 통해 외부로 녹아내리는 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그런 정화의 표출이 눈물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운이 좋게도 나는 예술품의 아우라를 통해 세 번의 카타르시스 경험을 고백할 수 있다. 눈물이 꼭 나약함의 상징만으로 생각할 것은 아니다. 나날이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저마다 스트레스를 정화시키는 비법을 구하는 것도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감성을 자극하는 매개체는 다양하다. 책장에서 쉬고 있는 소설이라도 읽어보자.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하기 위해서도 감성을 돋우는 많은 경험을 서슴지 말자. 눈물을 흘리면 혈압과 심박 수가 낮아져 마음이 안정된다고 하니 굳이 눈물을 감추거나 울음을 참지 말 일이다.

눈물과 울음 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카스트라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파리넬리’로 더욱 유명해진 헨델의 3막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다. “나를 울게 하소서. 나의 잔인한 운명, 난 자유를 열망해요, 이 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주여, 내가 받는 고통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 태 임
화가·삼육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