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16.06.05. 19:45
“아프냐? 나도 아프다.” ‘공감’에 대한 유명한 대사다. 몸이 많이 아픈 사람들, 사랑하는 이를 잃었거나, 경제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보면, 내가 그렇지 않은데도 마음이 아프다. 내가 저 힘든 경우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저 사람의 고통이 지금 내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야’라는 이기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이기심이 때론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만드는 긍정효과를 갖게도 한다. 하지만 비교하고 있는 ‘고통에 처한 타인’들이 모두 나보다 더 힘들고, 내가 덜 불행한 걸까. 이 ‘더’와 ‘덜’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한다고 할 때 나는 어떤 타인을 머릿속에 그려본 다음, 결국에는 내 스스로가 아픔을 갖는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와 동일한 사적 감각을 갖는 다른 사람을 상상한다는 가정은 헛소리다.” 그만큼 남의 고통을 함부로 나의 고통으로 치환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상상력은 사랑하는 마음과 정비례하기도 한다. 나와 가까운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은 때론 내 아픔보다 더 큰 고통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이 또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의 기만성’일 수도 있다. 이 고통 속에는 ‘나와 관계되는’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사적인 관계가 희박한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강남역 부근에서 살해당한 젊은 여인,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나이 어린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함께 아파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이 마음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 우리 모두 함께 살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을 우리는 ‘공감’이라고 한다. 나쁜 행정과 강력 범죄는 그러한 공감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타인의 고통을 자꾸 내 것으로 치환하려고 하며, 어떻게든 남아 있는 삶의 비빌 언덕을 찾아내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형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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