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6.22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관찰자의 기준틀이 달라지면 물체의 움직임 달라 보여
자신의 기준틀만 고집하면 해결책 영영 못 찾아
정치권의 유일한 기준틀은 '국민'이어야 갈등 해소

버스가 출발할 때 창밖으로 옆 버스를 보고 있으면, 내 버스와 옆 버스 중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가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고 보면(물리학에서는 이를 '내가 정지한 〈기준틀〉에서 보면'이라 한다)
옆 버스가, 옆 버스의 승객이 자신이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탄 버스를 보면 내가 탄 버스가
움직인다. 즉, 관찰자의 기준틀이 달라지면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달라 보인다.
사람이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는 자전하지도 공전하지도 않으며 우주의 정확한 중심에 정지해 있고
사람이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는 자전하지도 공전하지도 않으며 우주의 정확한 중심에 정지해 있고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천동설이다.
앞에 예로 든 시외버스 이야기와 많이 닮았다. 지구가 아닌 태양에서 행성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아예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에서 태양계 전체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이처럼 지구를 벗어나 기준틀을 바꿔보면 태양과 행성의 움직임을 더 쉽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지동설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예처럼, 과거 판단의 근거로 생각했던 기준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깨달아간 과정이 바로 과학 발전의 역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화의 발견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생물학적 위치가 다른 생명체와 연속선상에 놓여 사실 별로 다를 것도 없다는 것, 생명 현상을 바라보는 기준틀로
사람을 중심에 놓을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진화론의 발견이 우리에게 준 큰 깨달음이다.
과학의 역사에서 기준틀의 상대성에 대한 깨달음은 오랜 시간 힘겹게 이루어져 왔다.
과학의 역사에서 기준틀의 상대성에 대한 깨달음은 오랜 시간 힘겹게 이루어져 왔다.
우리 일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기준틀이 다른 이의 기준틀보다 나을 것 하나 없다는 깨달음은 의식적인 각고의 노력 없인 얻기 어렵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은 불변하고 주변이 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애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꾸지람의 대상인 '젊은 애들'이 나이가 들어 늙으면 화자(話者)만 바뀐 채 시대를 이어
되풀이된다.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할 때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변심이 이유라고 믿으려 한다.
우리 대부분은 '서로 다름'을 '나는 옳고, 상대는 그름'과 같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쉽게
그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자신의 기준틀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떤 버스가 움직이고 있는지 헷갈릴 때 답을 알아내는 좋은 방법이 있다.
어떤 버스가 움직이고 있는지 헷갈릴 때 답을 알아내는 좋은 방법이 있다.
옆 버스의 배경인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을 함께 보는 거다. 즉, 내 버스도 옆 버스도 아닌, 세 번째의 기준틀을 이용하는 거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사람마다 모두 생각이 다를 때가 많다.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는 상수고 상대가 변수라고 생각한다.
하나같이 자기의 기준틀에서 문제를 본다면 해결책은 영영 찾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논의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헷갈릴 때는, 버스 탄 사람이 하듯 세 번째의 기준틀로 눈을 돌리면 좋겠다.
국회에서 어떤 사안이 논의되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원 개인은 보이지 않고 소속 정당만 보일 때가 많다.
국회에서 어떤 사안이 논의되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원 개인은 보이지 않고 소속 정당만 보일 때가 많다.
여당과 야당의 주장이 평행선을 그리며 아무런 수렴의 기미도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합리적인 논의 과정을 통해 합의를 이루는 것이 영 불가능해 보일 때다.
각 정치 집단이 자신의 기준틀에서 만 문제를 보려 하기 때문 아닐까.
소속 정당의 기준틀을 벗어나는 것은 곧 상대 정당의 기준틀에 편입되는 것으로 여겨져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이럴 때는 시선을 돌려 세 번째 기준틀에서 문제를 보면 좋겠다.
세 번째 기준틀의 이름은 '국민'이다.
논의의 처음부터 아예 '국민'을 기준틀로 한다면 합의도 쉽지 않을까.
'국민'이 유일한 기준틀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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