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살며 생각하며길 걷기의 위안

바람아님 2016. 6. 25. 00:02
문화일보 2016.06.24. 14:20

김주영 소설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거두는 모든 경이적인 성과들은 길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듯하다. 이른바 바닷길, 밤길, 들길, 산길, 눈길, 숲길, 벼랑길 할 것 없이 우리 국토에 놓여 있는 어느 길, 어느 풍경 할 것 없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어 문밖을 나서면서부터 벌써 김홍도의 화첩 속을 기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어느 길을 가거나 빽빽하게 들어찬 수목들을 목격하며 한량없는 풍요를 가슴에 담는다. 어떤 이는 하찮게 여기는 이 길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오래전, 전문의로부터 심각한 폐 질환 진단과 함께 지금 당장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 그런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담배를 끊지 못했다. 그러던 중 유종호 선생님의 조언으로 담배를 끊게 되었다. 무엇보다 선생님 스스로도 실천에 옮겨 성공했다는 그 방법이 귀를 솔깃하게 했다. 담배를 끊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면서 담배를 끊는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담배 끊고 건강 챙길 수 있다면 그거 딱 떨어지는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이전에 나는 누구 못지않게 많은 길을 걸었다. 그 많은 세월 동안 걸었으면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걷는다는 생각은 못 했던 것이다. 이런 얼간이가 있나, 후회하면서 유종호 선생님이 그러했듯 그날부터 무작정 시가지를 걷기 시작했다. 그 시작으로부터 9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 단 한 개비의 담배도 피운 적이 없다. 모두 길 걷기에서 얻어낸 눈부신 성과였다.


그로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걷는 일에 더욱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구상도 걸으면서 하게 돼 이젠 방안에 처박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대대적인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선 어둡고 칙칙한 것이 싫어지고 밝은 것이 좋아졌다. 나는 길거리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꼈고,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걷다보니 점점 더 걷는 게 좋아졌다. 누구라도 길을 가자면 열 일을 제쳐놓고 무작정 따라 나섰다. 북한산 둘레길, 한라산 둘레길과 올레길, 청송 봉화의 외씨버선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인간이 쏟아내는 저주와 악담 대신, 산기슭 수목들을 촉촉하게 적시는 가랑비 소리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와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다.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9일 동안 걸으면서 내 가슴 속에 낀 먼지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훤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곳 가파른 바위 산기슭에 위태롭게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선하디선한 눈과 짖지 않는 개들은 내게 겸손한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었다. 너무나 고단해서 죽고만 싶었던 안나푸르나의 8박 9일 트레킹 코스, 너무나 멀리 직선으로 뻗어 있어 하루 종일을 걸어도 끝에 닿을 수 없어 목 터지게 울어버렸던 아프가니스탄의 하늘길, 가도 가도 뜨거운 뙤약볕이 삭을 줄 몰랐던 신장(新疆)성으로 가는 톈산(天山)산맥의 황무지 길, 좀처럼 눈을 뜰 수 없어 헤매기만 했던 고비 사막의 모래바람 길….


지구의 구석구석을 정복해버린 그 길들을 따라가려 하면,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다. 그 모든 길은 처음부터 내려놓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자각이 그것이다. 그런 길을 가려면 배낭 속에 든 손톱깎이 하나라도 모두 부질없는 것이고, 쓸데없는 집착이고, 탐욕에 불과하며 무거운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30일 동안 걸으면서 서너 번이나 터져 나오는 까닭 모를 통곡을 참을 수 없었다는 수녀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나 또한 울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길이라는 사위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무한대의 공간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길을 찾게 되었다는 정서적인 소득을 얻게 된다.


도대체 나는 길에서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그런 질문을 수없이 반복한다. 어쩌면 길은 우리로 하여금 가슴속에 켜켜이 내려앉은 탐욕과 울분, 저주와 시기의 땟국을 벗겨내는 마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발견한다. 그래서 길은 우리에게 버리는 것이 곧 얻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뭔지 모르지만…’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그처럼 길은 뭔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심성을 정화시키고 위로해주는 마법이 존재하는 것 같다. 최근 히말라야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치인이 그 여행을 통해서 많은 것을 버리고 올 것이라는 포부를 피력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이 과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어 돌아올 것인지 지켜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이게 웬일인가. 아침에 일어나 TV나 신문을 보면, 내 주위에 뻗어 있는 수많은 길, 산길과 밤길과 숲길과 눈길을 함부로 나다니다가 큰 봉변을 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가슴속을 엄습한다. 도대체 이런 변고가 없다. 언제 우리나라가 산길, 밤길을 거니는 사람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무차별로 살해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아득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다소 궁핍을 겪더라도,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더라도, 가슴을 치는 아픔이 있더라도, 코앞에 환난이 닥쳤더라도 단 일 분 동안이라도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생각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정겨운 산길과 들길과 눈길이 왜 이런 살벌함을 겪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