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탄원서, '대필(代筆) 세대'

바람아님 2016. 6. 26. 16:30

[만물상] 탄원서


(출처-조선일보 2016.06.25  최원규 논설위원)

10여 년 전 폭력 사건 피고인이 항소심 재판부에 탄원서를 냈다. 
'존경하는 ○○○ 부장판사님'으로 시작하더니 곳곳에 자기 이름을 굵은 글씨로 적고는 밑줄까지 좍 그었다. 
속셈이 있었다. 그와 재판장 이름이 같았다. 동명이인이니 봐달라는 뜻이었다. 재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량은 1심과 달라지지 않았다. 

▶형사재판에선 이른바 '범털'이든 잡범이든 탄원서나 반성문 하나쯤은 꼭 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다. 
가족들의 절절한 탄원도 있지만 황당한 것도 많다. 
글자 하나 안 고친 탄원서를 매일 써 내거나 성경 구절만 줄곧 베껴 내는 사람, 
'판사님 죄송합니다'만 반복해 A4용지 석 장을 꽉 채운 이도 있다고 한다.

[만물상] 탄원서
▶재벌 총수라고 다르지 않다. 
2년 전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재현 CJ 회장에 대한 항소심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가(家) 사람들이 
탄원서를 냈다. 유산 상속 분쟁으로 CJ와 사이가 틀어졌던 삼성이어서 눈길을 모았다. 
2006년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던 현대차 정몽구 회장 측은 물량으로 압도했다. 200만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냈다. 
1t 트럭 석 대분이었다. 재판장은 "보관할 장소도 없다"고 푸념했다. 
한화 김승연 회장이 보복 폭행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는 경제5단체장이 선처를 부탁했다. 
김 회장 둘째 아들도 "아버지 대신 처벌받고 싶다"는 탄원서를 냈다.

▶관심거리는 탄원서 효과가 있는지 여부다. 판사에게 물어보면 열이면 열 "별 효과 없다"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탄원'일 뿐 사실관계를 입증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혐의를 뒤집을 내용이 없으면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특히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선 변호사의 '전략'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탄원서에 상관없이 이재현·정몽구·김승연 회장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여지껏 대필(代筆) 업체 중에 '탄원서 작성하면 감형 보장한다'고 떠벌리는 곳이 있다. 모두 거짓이다.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된 부장판사 출신 최유정 변호사가 엊그제 재판부에 탄원서를 냈다고 한다. 
법원에 로비해 보석·집행유예를 받아주겠다며 100억원을 받아 법조 비리 사건을 촉발한 당사자다. 
탄원서엔 현재의 심정, 억울함을 담았다고 한다. 판사 시절 법원 문예 대회에서 대상을 탔던 그다. 
하지만 그 역시 판사를 해봤기에 탄원서에 별 효력이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써낸 것을 보면 법정에서 하기 어려운 절박한 얘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 사연이 궁금하다.



=========================================================================================================================================


[만물상] '대필(代筆) 세대'


(출처-조선닷컴 2016.06.24 김광일 논설위원)


이젠 말할 수 있다. 큰형이 군복무 때 서부 전선에서 받아든 어머니 편지는 막내가 대신 썼다. 

어머니도 문자 속이 밝으셨지만 군인 맏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려워하셨다. 

안방에서 난감해하시는 어머니를 곁눈질하고 있자니 잠시 뒤 막내를 부르셨다. 

늘 엄한 어머니가 그때만큼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부탁을 꺼내셨다.

 펜글씨와 잉크 냄새에 막 익숙해지던 중학생 막내는 '몸조심하거라' 같은 낮춤말을 엄마 대신 

큰형에게 해본다는 게 신기했다. 


▶장년층에게 '대필'이란 지금은 없어진 대서소(代書所) 혹은 연애편지 써주기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요즘은 아예 대필 업계가 호황이란다. 돈만 내면 어떤 글이든 써준다. 자기소개서가 개중 많다.

 탄원서·경위서·진술서·사과문·계획서… 없는 게 없다. 

사직서도 대신 써준다. 어떤 남자는 아내에게 잘못을 비는 반성문을 대신 써달라 맡겼다고 한다. 

다행히 유서 대필 소리는 못 들었다. 단골은 휴대폰 문자와 SNS에 길든 디지털 세대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법률 기관에 내는 문서를 아무나 대필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원래 변호사만 맡아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법원에 내는 반성문·탄원서를 대신 써준다는 광고가 버젓이 나돈다. 

대필은 자칫 실체적 진실이나 진짜 감정과 전혀 동떨어진 글을 짓기도 한다. 

누군가 대신 써준 가짜 편지가 인간관계를 뒤튼다. 처벌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래도 수요가 있으니 시장이 선다. 종류별로 A4 용지 한 장에 5만~10만원까지 여러 가지다. 


▶작년에 OECD가 '문장 이해력과 수치 이해력'을 조사한 보고서를 냈다. 

일본은 고루 1위를 차지했고 우리는 문장 이해력이 평균보다 낮은 10위였다. 

이는 건강·취업률·소득과도 관계가 깊었다. 고급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은 더 처졌다. 

친구랑 주고받는 문자는 영화 엔딩크레디트 올라가는 속도처럼 빠르다. 

그러나 길고 논리적인 글에는 끙끙대다 손을 들고 만다. 

마침 고려대 연구팀도 스마트폰을 일찍 쓸수록 중학 국어 성적이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어머니도 말씀이 속사포셨다. 그래도 훈계는 앞뒤가 정연하셨다. 자진해 종아리를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자질'이 하루 300건 넘는 SNS 세대는 텍스트 생산은 많지만 앞뒤를 잇는 컨텍스트에 약하다. 

스마트폰 강국이 되면서 생긴 응달이다. 

다른 나라는 대필업이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한 특수 서비스다. 우리처럼 '묻지 마 대필'은 없다. 

아무리 논술 학원이 성업해도 스마트폰에 빠지면 문장력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 

어머니 음성이 들린다. "종아리부터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