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일사일언] 수표와 동전

바람아님 2016. 8. 26. 09:25

(출처-조선일보 2016.08.26 이한빈·시나리오 작가)


이한빈·시나리오 작가 사진어느 순간부터 동전은 다소 귀찮은 물건이 되어버렸다. 물론 소중한 돈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애지중지하지도 않는 게 요즘의 동전이다.

10년 전쯤.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가까스로 2학기 등록금 중 일부를 마련하였는데, 학교 앞 은행에 가서 

직접 분할 납부를 해야 했다. 집을 나서기 전 고액의 수표가 든 등록금을 고이 주머니에 넣고 

혹시 모르니 용돈이었던 만원도 넣었다. 하지만 반대로 주머니 속에 있던 동전들은 모두 빼내었다. 

짤랑거림이 싫었고, 비싼 등록금을 내는 데 그들은 필요가 없어서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가까운 거리였으나, 푹푹 찌는 날씨 탓에 마을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 선택은 매우 훌륭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넉넉한 좌석이 날 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버스 카드를 찍는 순간 '잔액이 부족하다'는 냉정한 기계음이 울려 퍼지며 발생하였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미 출발한 버스였기에 내릴 수도 없었다. 물론 돈은 있었다. 

하지만 그 돈이라는 건 수표 두 장과 한 장의 만원권이었다. 

출발 전 주머니에서 빼낸 동전들이 떠올랐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기사님에게 만원을 넣겠다고 말했고,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마을버스 요금함 앞에선 백만원권 수표가 백원짜리 동전들보다 쓸모가 없음을 느낀 순간이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면 사람 사이도 똑같은 게 아닌가 싶다.

각자의 힘이나 재력, 지위 등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역할과 몫이 있다. 

사회적으로 큰 몫을 차지한 사람이라 하여, 작은 몫을 가진 사람의 역할을 모두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람의 몫과 가치를 구분 짓는 잣대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단순히 크고 비싼 게 더 가치 있다는 생각에 빠져 살다간 큰코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무더운 8월의 마을버스 안에서 쩔쩔맸던 것처럼 말이다. 

수표가 하는 일이 있고, 동전이 하는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