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시론] 남의 말 안 듣는 한국

바람아님 2016. 9. 11. 11:24

(조선일보 2010.02.11 앤드루 새먼·더타임스 서울특파원)

컨설팅받고 실천 안 하고 자문한 뒤
코 골며 자고 물어보고 자리 뜨고…
전문가의 견해를 듣는 척만 하면 심각한 문제 올 수 있다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친구가 있다. 
그는 최근 아는 사람에게 가정사를 상담하러 갔다가 화가 잔뜩 나서 돌아왔다. 
그 사람은 이혼 절차상 그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얘기를 일러줬는데, 정작 자기 변호사는 지금껏 
그 점에 대해선 입도 벙긋 한 적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에게 "왜 여태 그런 얘기를 안 
해줬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변호사의 대답은 이랬다. "안 물어보시기에."

몇년 전 한국 최초의 외국인 은행장이 된 윌프레드 호리에 제일은행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호리에 행장은 본사 경영팀은 소규모로 유지하고, 대신 일급(一級) 컨설턴트들을 고용해 
자문(諮問)을 받았다. 자문 내용은 착착 실행에 옮겼다. 
한번은 호리에 행장이 다른 한국 시중(市中) 은행장과 만나 이런 얘기를 하자, 상대방이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상대방은 "우리도 똑같은 컨설턴트를 기용했지만, 자문 내용을 실천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한다.

한국에서 홍보회사를 하는 친구가 있다. 한국 고객, 외국 고객을 모두 상대한다. 
외국 고객 중에는 거물급 투자자들도 있다. 그들은 CEO급이 직접 내 친구의 보고를 챙긴다. 
이와 달리 한국 고객은 정부 기관이 됐건 민간 회사가 됐건, 돈 내고 일을 맡겼으면서도 정작 내 친구의 보고를 챙길 땐 
실무자급 이상이 나설 때가 거의 없다.

몇달 전 나는 모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몇몇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국제 문제를 자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한국 중앙부처 공무원, 주한(駐韓) 외교관, 한국에 사는 저명한 외국인, 외국인 학자 등이 함께 갔다. 
리는 점심을 거하게 대접받았다. 이어 첫 순서로 중앙부처 공무원이 강연했다. 
다음은 외교관 차례였다. 그러나 외교관이 연단에 섰을 땐 행사장 맨 앞 두 줄이 텅 비어 버린 다음이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지자체 고위 공무원 태반이 슬그머니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몇년 전, 한 다국적 마케팅 회사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CEO가 거물급 한국 정치인의 초청으로 한국에 날아왔다. 
어떻게 '관광 한국'의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지 자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CEO는 자료를 준비해 한국에 날아왔다. 
그가 프레젠테이션하는 동안 그를 부른 정치인은 코를 골며 잤다.

내 아내는 런던에서 2년간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녀는 식음료회사들을 상대로 와인 리스트, 음식 트렌드, 마케팅 등 온갖 주제에 대해 자문을 했다. 
고객들의 사업에 핵심적인 주제를 자문하고도 그녀가 매번 쥐꼬리만한 자문료를 받는다는 점이 나로선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자문료 없이 밥만 먹고 돌아올 때도 많았다.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한국에서는 '전문가의 충고'를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높이 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껏 한국 경제는 산업계와 정부의 긴밀한 결합을 바탕으로 굴러왔다. 
한국이 저(低)신뢰사회(low trust society)였던 탓에 '인간관계'가 결합을 유지하는 핵심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전문가의 자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정부나 기업이나 내부 목소리만 신뢰한다. 
외부의 자문은 큰 그림을 그릴 때 정말 필요한데, 실제로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나 활용한다. 
그러니까 외부 전문가들 쪽에서도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고객의 요구에 단순 반응하고 말아 버린다. 
내 친구의 이혼을 맡은 변호사처럼 말이다. 
혹은 홍보회사 하는 내 친구처럼, 고객의 '브레인'이 아니라 시시한 손발 노릇을 해주는 데 그치고 만다.

외부의 서비스를 경시(輕視)하는 태도는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법적인 문제부터 회계 감사 시스템의 실패까지 
사회 전반적으로 심각한 폐해를 부를 수 있다. 
회계사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경청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경제적 재앙이 수없이 많다. 
법률가들이 사실을 말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새겨들었다면 치르지 않아도 됐을 사회·정치적 비용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