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0.04 길해연·배우)
한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편의상 내 어린 날의 교과서 주인공 철수라고 해 두자.
철수는 20년 전 연극 놀이 수업을 할 때 만난 아이다.
말보다 항상 주먹이 앞섰고, 그 악행의 정도가 초상난 데서 노래하고 만만한 놈 뺨 치던
놀부가 '형님' 하고 엎드려 큰절이라도 할 판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친구를 맹렬하게 달려가 밀어 넘어뜨려 놓고
"모르고 그런 건데 화내면 안 되지" 하며 비질 웃거나
선생 머리를 겨냥해 물건을 집어 던져 놓고 "잘못했어요.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해줘야 되는 거 아녜요?"
그러면서 킬킬대기도 했다.
고민 끝에 철수를 위한 대본을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로 했다.
착하고 정의롭고 희생정신이 투철한데 심지어 멋있기까지 한 '영수'라는 역할을 만들고 철수에게 제안을 했다.
욕심 많은 철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 연습 내내 철수는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폭력을 쓰는 순간 주인공을 포기하기로 약속을 하고 시작한 일인지라 철수는 주먹 쥔 손을 힘겹게 내려놓곤 했다.
그렇게 철수는 몇 개월을 잘 버텨냈고 영수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영수처럼 사니까 음…. 이유는 모르겠는데 기분이 좋아요. 근데요…. 너무 힘들어요.
영수 역할 말이에요. 만날 양보하고 나만 손해 보고, 왜 그러고 살아야 해요?"
'사람이라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살아보려 노력해야 되는 게 당연한 거란다, 얘야.'
이렇게 말하는 대신 손을 잡아 아이의 가슴에 대 주었다.
"여기가 따뜻해졌을 때 기분이 좋아졌지? 영수 역할을 할 때 말이야.
그 느낌을 잊지 말고 오래도록 기억해봐. 그러면 왜 그러고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될 거야."
서른이 다 됐을 그 아이가 가끔 생각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아인 어떤 배역을 선택했을까? 철수일까, 영수일까.
※10월 일사일언 필자는 길해연씨를 비롯, 이규탁 조지메이슨대 인천글로벌캠퍼스 교수와 황지원 오페라 평론가, 배우 강석우씨, 김은경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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