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0.11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前 외교부 장관)
트럼프 음담패설 스캔들에도 클린턴에 지지율 근소하게 뒤져
모든 것을 '거래'로 보고 이익 없으면 동맹도 없다는 그의 당선 가능성 배제 못해
우리 외교 만반의 대비 해야
지난 6월 23일 영국인들이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기 직전만 해도 많은 사람이 설마 설마 했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도 일어날까 봐 수많은 사람이 마음 졸이고 있다.
최근 터진 트럼프의 납세 기피 의혹, 거의 끝장났다는 말을 불러온 음담패설 스캔들에도
어제 2차 토론에서 트럼프는 당당했고 완주할 기반을 다졌다.
트럼프 지지 의사를 숨기고 있는 잠재적 지지층을 고려할 때 10% 정도 차이는 벌어져야 클린턴 승리가
확실하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 전까지도 두 사람의 지지도 격차는 4%에 불과했다.
어떤 이들은 당선되고 나면 트럼프의 생각이 바뀔 거다,
설령 바뀌지 않더라도 미국의 의회, 정당, 사법부, 언론 등 수많은 견제 장치가 그의 정치적 행동을 제어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트럼프의 기본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의 제도적 견제 장치들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더구나 외교와 관련해서는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이
위임돼 있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에서 9일(현지시각) 열린 대선후보 2차 TV토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오른쪽)과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발언하고 있다.
이날 토론에서는 트럼프의 음담패설 녹음파일과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 등 두 후보의 아킬레스건들이 일제히 도마에 올라
험악한 분위기 속에 거친 난타전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AP 연합뉴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의 생각은 한마디로 '고립주의'다. 미국이 그동안 세계 도처에 너무 많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외 개입을 줄이고 엉망이 된 집안 살림을 먼저 추슬러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립'에서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미국이 그동안 외국에 베풀었던 것을 다시 거두어 와야겠다"
(2015년 4월 발언)는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1차 TV토론에서 근거도 없이 한국·일본 등이 미군 주둔 비용을 안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동산 업계 출신인 그는 모든 것을 '거래'의 관점에서 본다. 즉 어떤 이념도 가치도 상관없고 오로지 '이익'만이 문제다.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확장을 위해 동맹을 맺고 해외에서 싸워준다? 그런 개념은 그의 머릿속에 없다.
'그렇게 해주면 돈을 얼마 낼 건데?' 그것이 그의 생각이고, 그래서 미국의 동맹국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의 해외 개입 축소 정책으로 유럽의 나토에 대해서도 미국은 소극적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비상시에 발트해(海) 연안의 나토 소국(小國)들을 러시아로부터 보호해줄 것인가?
트럼프는 그것도 돈 문제와 연계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부당하게 탈취하고 있기에 트럼프는 대(對)중국 무역 관세를 인상하려 한다.
모든 자유무역협정은 미국의 일자리와 경제적 이득을 뺏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도 폐기 대상이다. 한·미 FTA 역시 재협상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트럼프 당선 18개월 내에 장기 경제 침체가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빚 탕감을 위해 네 번씩이나 파산 신청을 한 트럼프가 미국 정부의 대외 부채를 그런 식으로 다룬다면
미 재무부 채권의 투매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결국 세계 권력 지도와 정치·경제 질서가 바뀔 것이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중심이 되고 유럽·일본·러시아·인도가 주변에 포진하는 '미·중 주도의 다극(多極) 질서'이다.
그 속에서 미국은 일본과 유럽을 양날개 삼아 중국·러시아 연합을 견제하는 형국이다.
인도는 조심스레 관망 중이다.
그런데 트럼프식 고립주의가 실행되면 미·일, 미·유럽 간 연대가 약화돼 서방 진영에 힘의 공백이 생겨나고
그 공백으로 중·러 세력이 파고들 것이다. 그러면서 세계 정치는 1930년대와 유사하게 국제 리더십의 공백으로 인해
표류할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무역 관세 인상에 대한 대상국들의 보복 관세로 무역 전쟁이 터지고,
수십년 우여곡절 끝에 나온 파리기후변화협정도 무력화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어려운 형국에 빠질 나라는 다름 아닌 한국이다.
북한과의 긴장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외 정책의 기본 축인 동맹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 해법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북한 관련 복잡한 현안들에 대해 한·미 간 조율은 제대로 될 것인가?
만일 우리를 무시하고 트럼프 행정부 마음대로 북과 교섭해버린다면?
그리고 당장 내년 초 방위 분담금 증액과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하고 나선다면?
한국이 비용을 더 내지 않으려면 스스로 지켜라, 핵 개발해도 상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그 아닌가?
그런 복잡한 와중에도 일본은 역시 빠르다.
트럼프의 외교 관련 보좌역인 마이클 플린(Flynn) 전 국방정보부장(DIA)을 10월 중순경 일본을 방문토록 초대했다.
희망적 사고에 안주하고 손 놓고 있기보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소통 채널을 미리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더 다급한 형편이다.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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