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0.18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18] 제인 오스틴 '설득'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 '설득'에 나오는 악당 월터 엘리엇은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여자도
눈여겨봐두었다가 기회를 타서 접근한다. 그에게는 먼 숙부가 있는데 딸만 있는 홀아비다.
숙부가 끝내 아들 없이 죽는다면 월터가 그의 준남작 작위를 물려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신분이 미천한 여자가 숙부에게 접근하자 이를 막으려고 그녀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려 했다가
그녀와 동거를 하게 되는 상황까지 몰린다. 오스틴의 작품에서 성적으로 방종한 남자는 반드시
의리가 없고 여자를 낚으려고 친 덫에 자신이 빠지고 만다.
나는 남자들의 '탈의실 농담(locker room talk)'을 싫어하지만 상황에 따라 일종의 유머로 인정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가 된 트럼프의 '탈의실 농담'은 격의 없는 친구와 편안한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한 농담이
아니고 짧은 이동 시간에 허겁지겁 쏟아낸 음담패설이었다.
2005년 트럼프타워 안 엘리베이터에서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한
레이첼 크룩(오른쪽). /데일리메일
트럼프에게는 온 세상이 탈의실 아닌가 싶다.
그는 남자들에게 남자답게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여자들에게 멋진 남자로
보이기 위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음담을 해야 한다고 믿는 유형의 남자 같다.
이 세상에는 여성에게 성적인 암시가 강한 찬사를 바치는 것이 여성에 대한
필수 예절이라고 확신하며, 그렇게 여성을 '공경'하는 자신의 능력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또한 여성 앞에서는 자동적으로, 제어 불능으로 성적 농담과
비유를 쏟아내는 남성이 있다.
나아가 여성에게 최대한의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기사도'라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하는 남자가 있는데 트럼프가 바로 그 전형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여성 각료나 관리, 백악관 인턴이 그 지저분한 치근거림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관록과 품위를 갖춘 유럽 여성 총리들이 얼마나 치를 떨고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피하려 하겠는가?
그리고 전 세계 언론은 연일 미국 대통령 괴담을 보도하느라 숨 돌릴 겨를이 없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자기의 여성 비하 발언이 언급되자 힐러리의 남편 빌 클린턴의 여성 편력을 들어 '반격'했다.
한눈판 빌 클린턴이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그는 대통령 직무는 수행했다.
그러나 돈과 섹스가 관심사의 거의 전부인 트럼프에게서 어찌 대통령 역할 수행을 기대하겠는가?
미국민이 과연 멸망을 자초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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