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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비밀책장] 창공은 영원히 푸르다, 그러나 사람은 얼마나 살겠는가

바람아님 2016. 10. 22. 10:35

(조선일보 2016.10.22 정유정 소설가)


앨런 와이즈먼 '인간 없는 세상'


정유정 소설가

어떤 풍경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아무 맥락 없이 꿈의 잔상처럼 나타났다가 꺼지듯 사라지는 기억이다. 

새벽녘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해 질 무렵 집 밖에서 아이를 부르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울릴 때, 

흰 저녁달이 어스름한 하늘에 걸려 있을 때… 나는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버린 동네 놀이터로 

소환된다. 땅거미가 내리는 잿빛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며 끼익끼익 소리를 지르는 빈 그네, 

그 옆엔 예닐곱 살 된 나와 동생이 있다. 우리는 나란히 쭈그려 앉아 모래밭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엄마가 퇴근해서 데리러 오는 걸 기다리는 중이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 

우리는 어떤 말을 나눴을까. 기억은 흐릿하지만 쓸쓸했던 느낌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엄마가 영원히 데리러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을 것 같아서, 나는 두려웠다.


"인간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의 진화는 필연이었을까. 

우리가 없어져버리면 우리 또는 우리만큼 복잡한 존재가 다시 나타날까?"


'인간 없는 세상'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앨런 와이즈먼이 풍부한 상상력과 지식, 취재를 바탕으로 써낸 영화 같은 

과학 에세이다. '인류 이전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짚어보는 데서 출발해 '인간이 지상에서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시간 여행기기도 하다. 나아가 인간이라는 포식자가 자연에 가해온 

심각한 폭력성에 대한 진술이며, 우리 존재의 의미에 대해 통렬하게 묻는 인간 없는 세상 연대기다.


인간 없는 세상 / 앨런 와이즈먼/ 이한중/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425p 

331.4-ㅇ483ㅇ/ [정독]인사자실(2동2층)

[강서]2층 종합서고(직원문의)


인간이 사라진 지 2일 후 세상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뉴욕 지하철역과 통로에 물이 들어차고 통행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천년 후엔 뉴욕에 남은 돌담들이 빙하에 무너질 것이며, 

50억년 후엔 죽어가는 태양이 내행성들을 감싸면서 지구는 불타버릴 것이다. 

영원히 남는 것은 우리가 남긴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전파뿐. 책을 읽는 내내 예닐곱 살 시절의 

그 두려움과 쓸쓸함을 느꼈다. 인간이 결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도.


인용된 이백의 시를 읽는다.

'창공은 영원히 푸르고 대지는 장구히 변치 않으며 봄에 꽃을 피운다. 

그러하나 사람아, 그대는 대체 얼마나 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