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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0] 자살의 진화생물학

바람아님 2013. 8. 3. 23:41

(출처-조선일보 2009.06.10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개미제국의 발견〉에서 나는 포식동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스스로 자기 배를 터뜨려 분비샘에 들어 있던 끈적끈적한 독극물을 적에게 뒤집어씌우고 장렬하게 죽어가는 말레이시아 목수개미의 행동을 소개한 바 있다. 언뜻 보면 우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자살 행위의 한 유형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종종 이처럼 남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숭고한 자살 앞에 머리를 숙인다.

오랫동안 자살을 한다고 알려졌던 레밍(lemming)이라는 설치류의 동물이 있다. 이른 봄 북유럽 들판에서 떼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갑자기 추운 강물로 뛰어드는 그들의 행동을 관찰한 생물학자들은 먹이가 부족한 상황에서 몇몇 숭고한 레밍들이 다른 동료들을 위해 자진하여 죽음을 택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해본 결과 그들의 행동은 이를테면 '신도림역 신드롬'과 같은 것이었다. 눈이 미처 녹지 않은 미끄러운 초원에서 맨 앞의 레밍이 낭떠러지를 발견하곤 급정거를 하려 해도 영문도 모른 채 뒤에서 달려오는 동료들에게 떠밀려 모두 함께 강물에 빠지는 것이다.

반(半)세기가 넘도록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를 연구한 제인 구달(Jane Goodall) 박사에 따르면 엄마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고 주검을 지키다가 결국 목숨을 잃은 어린 침팬지가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행동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생물학자가 보기에는 적어도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살을 기획할 수 있는 동물은 우리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자살도 과연 진화의 산물일까? '성공한 자살'뿐 아니라 미수에 그친 자살과 자살하고픈 충동의 예까지 모두 합하면 자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이다. 아직 번식기에 속해 있는 사람의 자살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번식기를 넘긴 사람도 여전히 자손의 번식을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자살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응적이지 않아 보인다. 보다 많은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 생명체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자살을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철학적 문제로 규정했지만, 진화생물학자에게도 자살은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 중의 하나이다. '2009년 다윈의 해'를 맞아 모두 함께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