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9.28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내가 3년여 전 서울대에서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길 때 계약서를 작성하며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내가 요구한 조건 중에서 대학 당국이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마 정년을 없애 달라는 것이었을 게다.
어떻게 관(棺)에 들어갈 때까지 월급을 받아먹으려고 하는가 하며 어이없어하기에 나는 실제로는 다른 모든 교수처럼
65세에 퇴임하겠다는 이면계약서를 따로 만들자며 표면적으로나마 대한민국 최초의 정년이 없는 교수로 발표해 달라고
거듭 간청해 보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대학교수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정년이 없다. 다만 적당한 시기에 기여도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학교와 합의하여
스스로 물러난다. 나는 그 당시 이미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라는 책을 내며 정년제도를 없애자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라. 그 옛날 석기시대에 정년제도가 있었는가? 농경시대만 해도 은퇴란 건 없었다.
큰 밭 매다 힘이 부치면 텃밭을 매고, 그것도 어려워지면 길쌈이나 새끼를 꼬다 돌아가셨다.
은퇴란 근대 전문직업사회의 산물이다. 나는 아직 일할 능력이 있고, 건강도 받쳐주고, 정말 일하고 싶은데,
사회가 나더러 새로 진입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비켜 달란다. 나는 일찌감치 이건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인권을 외치다'의 저자 류은숙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도록 '통제'당하는 인권의 문제들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노인의 지위는 은퇴라는 사건과 너무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농경시대의 노인들은 지금처럼 극적으로 추락하지 않았다. 일찍이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공할 고령화의
격랑 속에 매일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인들이 태어나고 있건만 우리는 아직 그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10월 2일은 우리 정부가 199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한 '노인의 날'이다.
금년 초 드디어 우리 인권위원회가 노인 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고 있는 나라로서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23년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어린이날이 언제부턴가 존폐 논란에 휩싸인 것처럼
노인의 날도 곧 불필요한 기념일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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