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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7] 기린

바람아님 2013. 8. 24. 17:03

출처-조선일보 2009.10.05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기린은 설명이 필요한 동물이다. 세상에 기린만큼 기이한 동물도 그리 많지 않다. 그 길고 굵은 목 위에 어쩌자고 그리도 조막만 한 얼굴을 올려놓았을까? 그 높은 곳에 위치한 뇌에 피를 공급하기 위해 기린은 길이 60cm, 무게 10kg의 거대한 심장을 갖고 있다. 기린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앞다리를 있는 대로 쩍 벌린 채 목을 한껏 낮춰 겨우 물을 마시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합의를 보지 못한 디자이너들이 제가끔 자기주장만 하며 만든 몽타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09년 '다윈의 해'를 맞아 기린만큼 자주 화제에 오르는 동물도 없다. 원시 기린이 점점 더 높은 곳의 이파리를 뜯어먹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신경액(nervous fluid)'이 기린의 목을 점점 길게 만들어주었다는 프랑스의 진화학자 라마르크의 주장을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바로잡아 주었다는 그 유명한 얘기가 금년 내내 세계 곳곳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기린의 목이 길어진 이유는 먹이 때문이 아닌 듯싶다. 관찰해보니 기린들은 먹이가 귀한 건기에도 나무 꼭대기가 아니라 어깨 높이에 있는 잎들을 주로 따먹는단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진짜 이유는 먹이가 아니라 짝짓기에 있었다. 길고 굵은 목을 가진 수컷들이 싸움도 더 잘하고 암컷들에게도 더 매력적이란다.

현대생물학의 원리에 따르면 라마르크의 이른바 '획득 형질의 유전'은 일어날 수 없다. 제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여 왕(王)자 복근을 얻는다 해도 내 아기가 아예 그런 복근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에 새겨진 복근이 아니면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기린의 목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치 총채처럼 생긴 기린의 꼬리가 날파리들을 쫓기 위한 진화적 적응이란 설명은 있어도 정작 기린의 목에 대한 설명은 없다. 후세의 생물학자들이 라마르크와 다윈 사이에 기린 싸움을 붙인 것이다.

경주 천마총 벽화의 천마가 말이 아니라 기린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어 역사학계에도 때아닌 기린 싸움이 붙은 모양이다. 적외선 촬영을 해보니 머리 위에 두 뿔이 선명하단다. 옛사람들은 성군이 태어나 어진 정치를 펼치면 기린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은 늘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