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트럼프의 말버릇

바람아님 2016. 11. 12. 23:37
조선일보 : 2016.11.12 03:05

사람이 쓰는 말과 글의 난이도를 측정하는 방법의 하나로 플레시-킹케이드(Flesch-Kincaid) 테스트가 있다. 문장과 단어 길이를 조사해서 쉬운지 어려운지 판별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미국 공화당 TV 토론에 참가한 경선 후보 9명이 이 테스트의 분석 대상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후보들 중 가장 쉬운 어휘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위대한 나라를 가지게 될 것이다(We will have a great, great country, better than before)." 3음절이 넘는 단어는 거의 없었다. 9~10세 수준 초등학생도 이해할 정도의 쉬운 말들이었다. 카네기멜런대 언어연구소가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를 포함한 주요 후보의 어휘, 문장을 분석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만물상] 트럼프의 말버릇
▶다른 후보는 대체로 중학생 수준이었지만, 트럼프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끔찍한(terrible), 좋은(good), 나쁜(bad), 거대한(huge), 위대한(great)…. 트럼프는 이런 단순한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유권자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시리아 민간 학살 책임이 있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에 대해서는 '나쁜 남자(bad guy)'라는 한마디로 평가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단순함·반복성·즉흥성을 트럼프 연설의 키워드로 꼽는다. 특히 그가 원고 없이 옆 사람과 쉬운 말로 대화하는 듯한 연설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9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유세에서도 그는 오바마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한 뒤, 단문(短文)으로 청중의 환호를 유도했다. "오바마 대통령, 듣고 있소?" 이와 함께 카메라 기자들이 나타나는 곳에선 양손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올리는 독특한 몸짓으로 사람들의 경계심을 해제했다.

▶트럼프는 그제 미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한국인에 대해 '아주 멋진 사람들 (fantastic people)'이란 말을 여러 차례 썼다. "100% 당신과 함께한다(I am with you)"라고도 했다. 영어를 배운 지 몇 개월 정도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듣기 좋은 말이다. 놀라운(amazing) 아름다운(beautiful) 등과 함께 그가 유세 때 수천 번은 쓴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을 듣고 안심한다면 트럼프 어법을 모르는 것이다. '남이 나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를 삶의 방식으로 삼아온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쉽고 치켜세우는 그의 말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다.

이하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