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트렌드 돋보기] 책상머리 지식인의 좌절

바람아님 2016. 11. 12. 08:08

(조선일보 2016.11.12 김신영 경제부 기자)


몇 년 전 겨울 '행복'에 관한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미국 동부 소도시 헌팅턴에 출장 간 적이 있다. 

미국의 가장 행복한 도시와 불행한 도시를 비교해보려는 취지였다. 

미국의 행복도를 조사한 갤럽은 헌팅턴을 미국의 가장 불행한 도시로 꼽는다. 공항에 내렸을 때 사람들 몸집이 너무 커서 

놀랐다. 12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이들이 흔히 보였다. 당시 한 지역 신문은 헌팅턴의 비만 인구 비율이 미국 최고 

수준이라며 이런 분석을 내보냈다. '공장 여러 개가 문을 닫아 수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헌팅턴 인구의 3분의 1이 

빈곤층이다. 이들은 싸구려 즉석 음식점에서 식사를 때우고 상당수가 비만 상태다. 이들에게 다이어트는 사치다.'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이 결정된 9일 '도대체 누가 트럼프를 찍은 거냐'라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때 헌팅턴의 풍경이 떠올랐다. 

기억은 집 앞 계단에 하릴없이 앉아 낮부터 맥주를 마시는 백인 남성들의 허탈한 표정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겐 "이민자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는 트럼프의 구호가 충분한 설득력을 지녔을 듯했다. 

헌팅턴이 속한 웨스트버지니아주(州) 유권자의 70%가 트럼프를 찍었다.


미국 엘리트와 지식인 대부분은 트럼프의 당선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도시의 번듯한 건물에 익숙한 그들은 헌팅턴같이 침체한 도시 근처엔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멋대로 '상식'의 테두리를 그어 놓고는 입맛에 맞는 전망만 그리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지식인 대표' 폴 크루그먼(뉴욕시립대 교수)이 대선 결과에 대해 뉴욕타임스에 올린 글은 

미국 지식인의 좌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제목부터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우리의 독자들이 미국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오늘 깨달았습니다. 

적나라하게 자격 미달이고, 기질이 불안하고, 무시무시한 데다 황당하기까지 한 후보를 

우리 미국인이 선택할 리 없다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런 우리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미국이 실패한 국가냐고요? 제 눈엔 충분히 그래 보입니다.' 

'지적인 우리'와 '이해 못 할 그들'을 여전히 가르고 있는 이 글에서 지식인의 패인(敗因)이 선명하게 읽힌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미국엔 '식스팩 조'라는 용어가 있다. 

매일 맥주 6캔들이를 사 갖고 집에 가서 마시면서 (책이 아닌) 스포츠 경기만 보다 잠드는 저소득·저학력 블루칼라를 

조롱하듯 부르는 말이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이른바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장지대)를 현장 영업하듯이 집중적으로 

돌면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경합주를 싹쓸이했다. 

민주당 후보 클린턴은 주류 지식인의 지지와 안이한 여론조사 수치를 믿고 승리를 자만하다가 쓴맛을 봤다. 

이번 미 대선은 현장을 모르는 깜깜이 '먹물'들의 한계를 드러냈다. 

보고 싶은 세상만 보는 책상머리 지식인의 완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