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한 사람’이 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다. 연일 충격적인 뉴스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요즘이 더욱 그렇다. 세상이 이토록 시끄러운데, 저마다 차분한 마음을 가지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이렇듯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나는 나보다 훨씬 큰 고통을 감내했던 사람의 글을 읽곤 한다. 예컨대 고(故) 윤성근 시인이 대장암으로 투병을 하며 지은 시들을 읽다 보면 내가 겪고 있는 지금의 충격이나 슬픔이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윤성근의 시 ‘고통의 마스터’는 이렇게 시작된다. “고통의 대가가 되는 방법을 아시나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고통을 아무리 많이 겪어도 고통의 대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식 먼저 보낸 고통/병들고 근육이 사라지는 앉은뱅이 누이의 아들과/보행기에 의존해서 걷는 게 싫다는 아이를 때리면서 함께 우는 엄마의 표정”을 바라보며, 아무리 고통을 겪어도 고통에는 익숙해지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깨닫는다. 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 길도/죽일 길도 없어서”, “그래도 숨은 붙어 있어 코에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한 아버지. 이런 환자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들이야말로 “고통의 마스터, 고난 극복의 천재들”이라고 말한다. 그들도 아프지만 않았다면, 눈부신 꿈을 가졌을 텐데.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고통의 마스터, 고난 극복의 천재가 돼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정여울 작가 |
‘꺼진 불’이라는 시는 더욱 아름답다. 시인은 죽음에 대해 농담도 하고, 의연하게 인격을 지키고 통증을 다스리고 싶지만, “초연하고 싶고, 물러나 있고 싶고,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데”, 잘 안 된단다. 칭찬받는 환자가 되고 싶은데, 난처한 물음도 안 던지고, 회진이 늦어도 불평하지 않고 싶은데, 자꾸만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고. 왜 의연하고 차분해지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걸까. “그것이 나는 왜 안 되는가. 왜 안 좋아졌다고/삐치고, 차도가 있다는 그 말을 듣기 원하는가.” 쿨하지도 못하고, 농담도 못 받아넘기는 자신이 참 싫다지만, 그렇게 솔직한 언어로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이 참으로 해맑다.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는 ‘악어의 눈물’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은 척 의연한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의연해지고 싶다. 아픔 때문에 주눅들거나 무릎 꿇고 싶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이 시대의 아픔 또한 반드시 지나가기를. 그 멀고 험한 길 위에서 부디 우리 모두 좀 더 의연하고 의젓해지기를.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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