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회사 상사는 "처녀·총각들은 빨리 퇴근하라"고 선심을 썼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어머니가 해주시는 저녁이나 먹어야겠다며 회사를 나서는데, 회사 동기인 친구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앞서 걷고 있었다. "너, 어디 가냐?" "어디 간다, 왜?" "여자 만나러 가냐?" "아니다." "그래? 같이 가서 확인해 보자." 나를 떼어놓으려는 친구 꽁무니를 쫓아 커피숍에 들어가 보니, 세상에,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모 방송사 메인뉴스 여자 앵커가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막 만나기 시작해 아직 말도 놓지 않은 사이였다. "이 친구가 쑥스러우니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왔습니다." 그렇게 미친놈처럼 두 사람의 크리스마스 데이트에 끼어들었다. 실로 용기나 무모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찌질함의 결정판이었다.
두 사람은 홍대 앞 무슨 카페를 예약해두고 있었는데, 그날 그 카페는 커플에 한해 예약을 받았으며 1인당 얼마씩 내면 음식과 술을 무제한 줬고 레크리에이션 사회자를 섭외해 커플 게임을 하는 이벤트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카페 주인에게 "이 여자분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라서 세 명이 왔다"고 설레발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모든 테이블에 커플이 앉았고 혼자 온 사람은 사회자와 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회자의 진행이 무척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나도 저 정도는 하겠다"며 맥주를 홀짝이다가 어느 순간 실제로 무대에 올라가 사회자를 제치고 그 카페의 밤을 진행했다. 친구 커플의 전언으로는 "그 집에서 돈 주고 섭외한 사회자보다 훨씬 재미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결국 결혼해 똘똘하고 잘생긴 아들을 낳았다. 지금도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야기하며 "그날 어떤 폭력 사태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면서 "그래도 그날 밤 진짜 재미있게 놀았다"고 말한다. 올해도 아무 계획이 없는 싱글이라면, 미친 척 친구 커플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습격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단, 폭력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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