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자유부터 보장해야 창의력 융성
블랙리스트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청와대·문화체육관광부에서 현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 9473명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의혹이 도마에 올랐다. 특검 칼날은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정무수석으로 향하고 있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을 넘어 이젠 권력의 민주주의 농단 혐의까지 짙어진다.
블랙리스트의 구체적 의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밥줄을 끊어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며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막겠다는 흉계가 아니라면 이런 걸 왜 만들었겠는가. 높은 사람 비위를 거슬렀다고 손봐줄 사람 명단을 작성한 것 자체가 과거 전제군주 시절 ‘환관’들이나 하던 짓이다. 국민과 나라의 가치고 존엄이고 죄다 팽개치곤 오직 권력자에게 잘 보여서 한 몸의 영달을 꾀했던 집단 말이다. 민주주의의 등뼈이자 시대정신의 거울인 ‘표현의 자유’를 무시하고 문화예술을 한낱 권력자의 ‘기쁨조’로 전락시키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시각도 드러난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세력은 언론에도 재갈을 물리고 싶어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지금 거론되는 사람 중에는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와 언론인들에게 ‘경고의 말’을 수없이 했던 인물도 있다. 진실을 가리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여론조작을 시도한 셈이다.
이들처럼 비판의 입을 틀어막고 ‘용비어천가’만 남기면 태평성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역사가 증명하는 착각이다. 거의 1500년 전 당 태종(598~649·재위 626~649)이 이를 겪었다. 그를 17년간 모신 신하 위징(580~643)은 사료에 기록된 간언만 200차례가 넘을 정도로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다. 대부분 황제를 난처하게 하는 직언이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숨지자 친히 비문을 썼는데 이내 묘비를 깨뜨리며 화풀이를 했다. 생전의 심한 간언이 떠올라 잠을 못 이뤘던 모양이다. 신하의 쓴소리에서 벗어나자 황제는 자기 뜻대로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해 퇴각하면서 “위징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장탄식을 했다. 수도에 돌아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당 태종은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라도 깨달았기에 제국을 세울 수 있었겠지만 반성할 줄 모르는 권력도 있게 마련이다. 그들에겐 역사가 무덤에 침을 뱉었다. 블랙리스트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을 제공한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그렇다. 찰스 1세가 청교도혁명으로 1649년 처형되자 아들인 그가 이에 개입한 58명의 판사와 법정관리 등 손볼 사람 명단을 작성한 게 블랙리스트의 시초라고 한다. 1660년 왕정복고로 즉위한 그는 이 중 30명을 처형하고 25명을 종신형에 처했다. 보복정치를 일삼았으니 ‘최악의 군주’라는 오명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후임인 동생 제임스 2세는 명예혁명으로 쫓겨났다.
미국에서도 ‘할리우드 10’이라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악명 높다. 1947년 하원 비미국활동위원회가 증인으로 소환했지만 양심의 자유를 지키겠다며 출석을 거부한 10명이 대상이다. 영화제작자협회(MPAA) 회원사 사장들은 이들을 해고하고 앞으로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공산주의에 대응한다며 그들 못지않은 인권유린을 한 셈이다. 역사는 이를 미국의 수치로 여긴다.
피해자인 돌턴 트럼보(1905~76)는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 ‘로마의 휴일’(1953)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름을 밝히지 못했고 아카데미상도 다른 사람 명의로 받아야 했다. 1960년 ‘스파르타쿠스’와 ‘엑소더스’의 시나리오를 실명으로 발표하면서 가까스로 해금이 됐다. 그동안 블랙리스트 때문에 미처 펴보지도 못한 채 사라진 꽃봉오리가 얼마나 많았을까.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에 그야말로 ‘블랙 리스크’를 초래했다.
한국에서 블랙리스트가 유지됐다면 어떤 피해를 끼쳤을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권력은 싫은 소리보다 달콤한 찬사만 듣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다. 블랙리스트가 음으로 양으로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는 이유다. 이를 막으려면 국민과 언론이 권력을 부단히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곧 있을 다음 대선이 첫 시험대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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