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다산 정약용에게 내린 한자 발음사전 ‘어정규장전운’(위 사진). 상단에 수정할 사항과 함께 ‘신(臣) 용(鏞·정약용)’이라고 붉은 먹으로 적은 다산의 글씨(점선 안)가 선명하다. 아래 사진은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가 소장했던 산수도로 다산이 칠언절구 제시(題詩)를 쓰고 그림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1796년 정조가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 내린 운자(韻字) 사전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다산이 덧붙여 쓴 것이다. 다산은 이 책에 빼거나 더할 사항을 위의 여백에 붉은 먹으로 썼다. 다산의 친필을 비롯한 저술 가장본(家藏本·종가 소장본)과 서화 등이 대거 공개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경기 성남시 분당구)은 미공개 자료 다수를 포함한 다산 관련 학술자료(저술류 28점, 시문·서화·고문서류 12점)를 20일부터 한중연에서 전시한다.
“은혜를 입고 갚지 않는 것은 고인이 비유컨대 우석(雨石)이라 한다. 빗물이 흙에 떨어지면 흙은 비를 품으니 이로 말미암아 오곡백과가 생겨나고 잎이 자라 그 꽃을 피움으로써 비의 본래의 뜻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산재냉화(山齋冷話)의 한 구절이다. 다산이 자신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사상을 피력한 친필이다. 다산이 드물게 사용한 호 ‘철마산초(鐵馬山樵)’의 인장이 찍혀 있다.
다산이 후학에게 ‘멘토링’한 친필 ‘현진자설(玄眞子說)’도 전시된다. 제자에게 두꺼비와 호랑이의 예를 들어, 자기 장점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라는 내용이다. “두꺼비는 … 땅이 얼더라도 깊이가 몇 자가 되어 몸이 얼지 않는다. 일을 도모함에 미리 마음 씀씀이를 부지런히 했기 때문이다.” 안승준 한중연 고문서연구실장은 “비단 바탕에 쓴 글씨가 단아하면서도 내면 세계가 잘 드러나, 보물로 지정된 ‘하피첩’에 견줄 만하다”고 말했다.
그림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다산이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산수도도 있다. 남종화(南宗(화,획)) 계열의 수묵산수도로, 위쪽에 정약용이 칠언절구 제시(題詩)를 썼다. 그림의 아래쪽 귀퉁이에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1793∼1865)의 소장인이 찍혀 있다. 다산의 문인 제자 아들 손자들의 종합 시문집 ‘유수종사시권(游水鍾寺詩卷)’도 공개된다.
강진 유배 시절 정약용의 서풍(書風)이 잘 드러나는 현진자설. 제자에게 자질을 성실히 계발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들은 김영호 전 유한대 총장(한중연 석좌교수)이 2015년 한중연에 기탁한 189점(저술 166책, 시문·서화·고문서 등 23점) 중 일부다. 김 전 총장은 연세대 실학연구교수로 일하던 1970년대부터 다산을 연구하며 사비로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70년대 어느 날 다산 자료가 보따리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택시로 한달음에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땅 팔고 빚내서 사 모으다 보니 집에서 쫓겨날 지경이 되기도 했지만 한국학의 보고(寶庫)를 찾았으니 다행”이라며 웃었다.
한중연은 17, 18일에는 국제 학술회의 ‘세계사 속의 다산학’도 개최한다.
조종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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