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동서남북] 어느 민족주의자의 눈물

바람아님 2017. 3. 16. 23:25
조선일보 2017.03.16 03:08

노(老)학자는 지난해 가을 유서를 썼다고 했다. 지독히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며 죽음이 벼락처럼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단다. 유서엔 직장(直葬)을 당부했다고 한다. 빈소 차리지 말고 바로 화장한 뒤 고향 뒷산에 뿌려달라고 썼다. 나이가 들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도 했다. 영예로운 죽음에 미련 따위 없다고 했다. 그저 이 민족이 한 치 앞 안 보이는 암흑의 길을 어찌 헤쳐 갈지 걱정이라고 했다.


숙연히 그의 이야기를 듣다 태극기 집회를 메웠던 백발노인들을 떠올렸다. 눈보라 치고 비바람 불던 지난 넉 달 동안 그들은 휘청이는 몸으로 광장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린 순간 가슴을 치며 혼절한 사람도 많았다. 그중 몇은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사망 소식이 짧은 자막 뉴스로 흐르던 날 촛불광장에선 승리의 폭죽이 터졌다.

태극 민심은 무엇이 그리 간절해서 광장으로 나왔을까. 촛불 주도자들 말마따나 그들은 권력을 비호하는 수구 세력일까. 박정희 신화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일까?


다수가 70대였던 그들은 분단과 전쟁, 가난과 산업화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다. 은퇴 후 풍요보다는 빈곤의 노년을 겪는 서민층이다. 체제의 수혜자 혹은 기득권 세력과는 거리가 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백 번 잘못했지만 그것이 국란 수준으로 커져 나라를 흔들 일은 아니었다고 믿기에 뭉쳤다. 안보에 대한 위기감은 치명적이었다. 김정은을 지도자로 인정하고 미국보다 먼저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정치인보다는 차라리 박근혜가 낫다고 여겼다. 사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가 위중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파면됐고 그들의 희망과 신념도 함께 유폐됐다.


헌재 결정 후 '국민 통합'은 이들의 눈물과 탄식을 끌어안는 데서 시작했어야 옳았다. 이정미 재판관이 낭독한 대로 우리 모두 "역사의 법정 앞에 서게 된 당사자들"로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잡아 일으켜줬어야 했다. 그러나 유력 대선 후보들과 야당은 이를 외면했다. 표독한 집주인처럼 당장 청와대를 비우라 질책했고, 점령군인 양 모든 정부 정책을 중단하라 엄포를 놓았으며, 닉슨 전 대통령처럼 승복의 메시지를 내놔라 다그쳤다. 검찰 수사를 앞둔 박 전 대통령에게 승복은 곧 유죄 인정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국민 대통합은 쫓겨난 대통령이 아니라 승자(勝者)라 자처한 사람들 몫이었다. 헌재 결정 직후 정치권이 합심해 박 전 대통령 사면을 결단했다면 나라의 격은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임기 중 파면으로 최고 형벌을 받은 대통령을 굳이 법정에 세워 태극 민심에 또 한 번 상처를 내는 건 보복의 정치를 불러올 뿐이다.


노학자는 "우리는 유독 분열할 때만 민족과 정의를 앞세웠다"고 했다. "그래서 민족이란 말을 낡은 것, 반역적인 것으로 왜곡시켰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난 대한민국주의자"라며 웃는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숱한 고난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으니 잘되겠지. 내 삶의 마지막 가치 기준은 그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냐, 아니냐에 있다네."

적폐 청산이란 이름으로 적대와 증오를 부추기는 이 시대 정치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