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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창의력 가로막는 私교육

바람아님 2017. 3. 19. 12:07

(조선일보 2017.03.18 안석배 논설위원)


싱가포르 룰랑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실 바닥에 앉아 수업한다고 한다. 

레고(Lego)로 악어 모형을 조립한 후 악어 입을 여닫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는 식이다. 

학생들은 악어 로봇 만드는 과정을 통해 수학·과학·언어 과목을 통합해 공부한다. 

싱가포르는 10여년 전부터 '덜 가르치고 더 많이 배우게(teach less, learn more)' 정책을 펴고 있다. 

수업 시간에 80%만 가르치고 나머지 지식은 학생 스스로 찾아가라는 거다. 

'20% 여백'이 창의력 교육의 마당이다.


▶핀란드도 비슷하다. 

이 나라 초등학생들은 한 학기 자기가 하고 싶은 활동을 정해 탐구하는 '과학 도전 프로젝트' 학습을 한다. 

커리큘럼 짤 때는 창의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업 인사도 참여한다. 

헬싱키가 괜히 '유럽 스타트업의 수도'로 불리는 게 아니다. 

뉴질랜드 학교에선 주요 과목이 국어·예술·체육 순(順)이다. 

예술·체육을 중시하는 것은 이를 통해 아이들이 사회성과 관계 능력을 

키운다고 믿기 때문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세계가 창의성 교육으로 뜨거운데 한국은 20~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암기·객관·주입식 교육이 몇십년째 똑같다. 주범은 입시와 사교육이다. 

핀란드 어린이가 유치원에서 장난감 놀이, 야외 놀이할 때 한국 어린이는 학원에서 영어 단어 외우고 시험 준비한다. 

만 2세의 45%, 5세의 83%가 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초등학교 하교 시간 정문 앞에 노란색 학원 버스가 줄 서 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사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창의력이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유치원생과 초등생 270명을 조사하니 사교육 횟수가 일주일에 한 번 늘수록 창의력 점수는 0.5점 떨어졌다. 

반면 아이에게 독립심 키워주고, 격려하고, 가족 간 유대감이 좋을수록 창의력은 올라갔다. 

몇년 전 미국 아이비리그에 입학한 한국 학생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사교육 받고 좋은 점수 받아 입학했지만 토론하고 자기 생각 발표하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육아정책연구소 발표를 접한 학부모 중엔 '어려서부터 학원 보낼 필요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 학원가엔 이미 창의력 사교육까지 유행이다. 

과학·수학 학원이 창의력을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입시에 인성(人性)을 반영한다고 하자 '인성 사교육'까지 나왔다. 

인성 학원은 '아이가 착하게 보이도록 해드립니다'라고 홍보할까? 

낡은 입시와 끝을 알 수 없는 사교육 행진이 4차 산업혁명 시대 우리 모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