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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뉴스로책읽기] [42] 피부로 듣는 사랑의 목소리

바람아님 2017. 4. 4. 08:28
(조선일보 2017.04.04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42] 헬렌켈러 '나의 이야기'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시각·청각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는, 
"시각 장애는 사람을 사물로부터 분리하지만 청각 장애는 사람을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에 
청각 장애가 훨씬 더 가혹한 장애라고 말했다.

청각장애인들은 외모상으로 장애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청각 장애를 가벼운 장애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생애 최초의 몇 년을 완전히 적막 속에서, 아무런 말도, 소리도 못 듣고 
자랐다면 우리의 의식과 감정의 상태가 어떠했을까? 
비장애인이라면 끊임없는 언어의 물결 속에서 저절로 습득하는 언어를 청각장애인들은 한 단어, 한 단어를 '인위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사물의 이름을 일일이 습득하기도 벅찬데 조사(助詞)나 가정법 같은 문법적 요소들을 이해하기는 얼마나 
어렵고 추상 개념, 감정을 파악하기는 얼마나 힘들겠는가. 언어를 '정복'하더라도 그들은 가족의 목소리도,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고 음악의 축복도 누릴 수 없다.

농아인들이 땅을 딛고 서서 세상과 유대를 맺고 지식의 세계에 진입하도록 도와주는 서대문구립농아인복지관 겸 도서관이 
지난 3월 30일 창립 10주년을 기념했다. 농아인 복지관은 전국에 다섯 곳, 서울에 단 두 곳이 있을 뿐이다. 
서대문구립농아인복지관은 남가좌동의 좀 허름한 건물에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전국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농아인 도서관이 있고, 여러 개의 작은 사무실에서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받은 농아인들에게 소리를 구분하는 훈련, 
대화 상대의 입 모양을 보고 말을 해독하는 교육 등 여러 가지 교육과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도서관에서는 농아인을 위해 세계명작 등의 도서를 비디오로 제작해 전국에 보급한다. 사업 예산 중 15억원 정도를 
서울시가 지원하지만 7억~8억원은 이정자 관장이 여러 기업체 등에 일일이 지원 서류를 제출해 따내서 충당한다.

작년 아모레퍼시픽에서 지원받은 1억원으로 농아인 청소년들을 베트남에 파견해 빈민을 위한 주택 건설 자원봉사를 
하게 했다. 자신을 구호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농아인들이 스스로 남을 도우며 얼마나 큰 긍지를 느꼈겠는가. 
어린 헬렌 켈러를 적막과 암흑의 감옥에서 나와 세상의 등불이 되게 한 설리번 선생님의 역할을 우리 정부와 민간이 
협동으로 수행할 수 있으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