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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0교시 체육

바람아님 2017. 4. 19. 08:52

(조선일보 2017.04.19 안석배 논설위원)


미국 시카고 근처 네이퍼빌 센트럴고교에서는 매년 9월 독특한 신입생 신고식이 열린다. 

오전 7시 졸음 덜 깬 눈으로 등교한 아이들에게 교사가 소리친다. "지금부터 운동장에 나가 트랙(400m) 네 바퀴를 달린다. 

마지막 한 바퀴는 숨이 차오를 때까지 전력 질주!" 이 학교의 전통인 '0교시 체육' 수업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학생들 뇌를 깨운 후 교실로 보낸다. 

이 수업을 받은 학생은 읽기 능력과 문장 이해력이 17% 향상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운동장에서 땀 흘리고 나면 공부 잘됐던 기억이 있다. 과학자들은 "당연한 현상"이라 말한다. 

1995년 UC 어바인 연구팀은 운동하면 뇌에서 학습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뇌세포가 자극받는다고 발표했다. 

2007년 독일 학자들은 운동 후 어휘 습득 속도가 20% 빨라진다고 했다. 

매일 40분 신체 활동을 하면 뇌가 자극을 받아 학습 능력이 오르고 집중력·창의력이 향상된다는 하버드대 연구도 있다. 


[만물상] 0교시 체육


▶꼭 공부 때문에 스포츠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영국 사립학교에선 폭력·음주 문제가 심각했다. 

혈기 왕성한 사춘기 소년들이 기숙사 생활로 쌓인 스트레스를 술과 주먹으로 풀었다. 

고민하던 학교는 학생들을 럭비 구장으로 불러냈다. 땀 흘리고 뛰면서 소년들은 패기와 협동과 배려심을 익혔다. 

웰링턴 장군은 "워털루 전쟁의 승리는 이튼스쿨 운동장에서 쟁취했다"고 했다. 

한 사회 인재들의 책임감과 정의감은 운동장에서 길러진다. 


▶한국의 학교에선 체육이 천덕꾸러기 신세 된 지 오래다. 

고교에서 체육 수업을 하면 학부모들이 "왜 아이들 뺑뺑이 돌리느냐"고 항의한다. 

입시 설명회에선 "아이들 운동시키지 마세요. 피곤해서 잠만 자요" 하는 요구가 쏟아진다. 

지난해 한 조사에선 고교생 절반이 "1주일에 땀 흘리는 운동 시간이 1시간 이하"라고 답했다. 

5년 전 서울대가 신입생 체력 검사를 했더니 남학생 체지방률이 55~64세 수준이었다. 

근력은 55~59세, 유연성은 40~49세와 맞먹었다. 

청년이 아니라 장년이 지난 몸으로 대학에 들어온다. 


▶10여 년 전 네이퍼빌에서 시작된 학교 스포츠 혁신은 미국 내 6만여 학교로 확산됐다.

이 운동을 펼치는 존 레이티 하버드 의대 교수는 그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온종일 학교와 학원에 앉아 지내는 

한국식 교육은 학생들 능력과 창의력을 끌어내린다"고 말했다. 

입시 만능 교육에 대한 뼈아픈 경고다. 마라톤같이 긴 인생을 살 아이들이다. 

문제 한둘 푸는 것보다 삶을 완주해 낼 생각의 힘과 정신력, 체력을 키워줘야 한다. 

우리는 반대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