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通 청산한다며 재계 입 틀어막기
前 정권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문재인 대통령의 1호 지시로 설치된 청와대 일자리 상황판엔 18개 지표가 뜬다. 실시간 업데이트되는 지표를 문 대통령이 매일 챙긴다고 한다. 사실 '실시간'이라 하긴 뭣하다. 모든 지표가 월(月)이나 3~6개월, 길게는 1년마다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거의 바뀌는 게 없으니 상황판이라기보다 장식물에 가깝다. 일자리를 향한 대통령의 강렬한 의지만 느껴질 뿐이다.
정작 일자리 상황판이 세간의 화제에 오른 건 다른 이유였다. 상황판을 시연하던 날 문 대통령은 재벌의 일자리 동향도 파악하겠다고 했다. 그룹별 채용 규모나 비정규직 수치 같은 것을 상황판에 올릴 모양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재벌들이여, 내가 지켜보고 있다', 이런 뜻 아닌가. 아무튼 재계는 비상 걸렸다. 찍히면 큰일이라며 눈치 보기 분주하다.
청와대 상황판엔 원조(元祖)가 있다. 이명박(MB) 정부 때의 지하 벙커 상황판이다.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지자 MB는 청와대 지하에 상황실을 차렸다. 워룸(war room)으로 불리는 전시 작전통제실 안이었다. 여기에 주가·환율 등이 중계되는 모니터 상황판을 걸었다. 임기 말까지 MB는 지하 벙커 회의를 145회나 주재했다.
그 무렵 만든 'MB물가지수'도 또 다른 상황판에 다름없었다.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며 52개 관리 품목을 뽑아 관리에 들어갔다. 역시 메시지는 분명했다. '가격 올리는 업체는 가만두지 않겠다'였다. 기업의 저승사자라는 공정위가 감시견으로 동원됐다. 농심이 비싼 신라면 제품을 내놓자 공정위가 팔 비틀어 철회시키기도 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MB물가지수를 "70년대식"이라고 비난했다. 지하 벙커 회의는 "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비판하던 MB 스타일을 지금 문재인 정부가 따라 하고 있다. 행정력으로 밀어붙이려는 발상이 그때나 큰 차이 없다.
문 대통령의 국정 철학 1호는 적폐(積弊) 청산이다. 문 대통령은 '이명박근혜' 프레임 하나로 대선을 치렀다. 보수 정권 10년을 청산할 적폐로 규정하고 취임 후엔 과거 뒤집기부터 시작했다. 4대 강에 손대고, 국정교과서와 누리 과정 예산 등을 뒤바꿨다. 과거 정권과 무조건 거꾸로 가겠다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행태만큼은 전임자들과 유사한 부분이 한두 곳 아니다. 인사 검증 부실부터 그랬다. 위장 전입과 탈세, 자문료 의혹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렇게도 보수 정권의 '적폐 인사'를 비난하더니 똑같은 덫에 걸렸다. 청와대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변명도 과거와 빼다 박았다.
점령군 행세도 빼놓지 않았다. 국정기획위는 군기 잡기에 여념 없고, 총리는 '촛불 혁명의 명령' 운운했다. 적과 아군의 편 가르기 조짐도 보인다. 역대 정권이 늘 하던 일이다. 가려는 방향은 전임자들과 정반대지만 권력 행태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문 대통령은 보수 정권의 정경(政經) 유착을 비판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강압적으로 대기업 돈을 걷은 혐의로 탄핵당했다. MB 정부도 기업 모금으로 공익 재단을 세웠다. 문 대통령은 이것이 적폐라고 했다. 기업은 돈 내고 권력은 편의 봐주는 유착 구조를 깨겠다 했다.
문 대통령이 재벌 총수와 독대해 밀담을 나누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팔 비틀기'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대통령이 재벌 일자리를 챙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압박이다. 국가기획위원장은 "(기업들이) 압박으로 느껴야 한다"고까지 했다. 알아서 협조하라는 서슬 퍼런 얘기다. 이쯤 되면 과거 정권의 팔 비틀기 모금과 다를 게 없다. 일자리냐, 재단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문 대통령은 사정 기관을 통치에 활용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 약속을 믿는다. 그러나 검찰·국세청 말고도 권력이 쥔 수단은 무궁무진하다. 각종 인허가부터 산업정책, 규제 등으로 표 안 나게 기업을 통제할 수 있다. 대기업들이 전전긍긍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칼은 칼집에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문재인 정부도 그걸 안다.
문 대통령은 또한 불통(不通)의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했다. '이명박근혜'의 국정 일방통행이 나라를 망쳤다고 비판했다. 그랬던 문재인 정부가 경총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반성하라'며 융단 폭격을 가했다. 국정기획위원장은 재벌을 '최대 기득권'으로 몰아붙였다. 권력이 기업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가 여전하다. 그러면서도 소통과 통합을 말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대통령이 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임자가 깔아놓은 실망의 그늘이 워낙 깊었던 탓도 컸다.
시간이 흐르면 정권 교체의 감동은 사그라진다. 그럴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그렇게도 적폐라고 비난하던 전임자들 행태와 무엇이 다르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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