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6.23 박정훈 논설위원)
안보 동맹은 있지만 경제엔 동맹이 없다
죽을 힘 다해도 될까 말까인데
우리는 스스로 제 발목 잡고 있다
우리에겐 병자호란(1636~37)의 예고편과도 같은 기사가 지난주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다.
제목은 '중국 베끼는 미국 IT기업들'이다.
모방꾼으로만 알았던 중국이 놀라운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고 신문은 썼다.
IT 서비스 산업에서 중국 기업은 세계가 벤치마킹하는 혁신 모델이 됐다.
실리콘밸리조차 중국 기업을 베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무서운 얘기다. 중국 경제엔 질(質)의 약점이 있다.
덕분에 우리는 중국보다 사다리 위쪽에 서서 중국 특수(特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중국이 질까지 거머쥐려 한다. 거대 중국이 혁신 능력까지 갖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양과 질을 다 장악한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재앙이 될까.
지금 우리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중국을 앞서 있다. 중국보다 잘살고 국가 발전 수준도 높다.
그런데 잊어선 안 될 사실이 있다. 긴 역사 속에서 지금은 지극히 예외적 시기라는 것이다.
수천 년간 중국은 선진국이었고 우리는 변방이었다.
우리가 중국보다 잘살게 된 것은 근래 30여 년에 불과하다.
이것이 영원할 것이라 여긴다면 착각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엔 숨은 공신이 있었다.
공산 중국의 건설자 마오쩌둥(毛澤東)이다.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1966~76)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중국이 광란에 빠진 사이 우리가 먼저 경제개발에 착수했다.
그 10여 년이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우위를 낳았다.
그러나 10년 선착(先着) 효과도 약발을 다해가고 있다.
우리는 중국 경제를 한 수 아래로 여긴다. 그러나 중국 경제엔 우리가 무시하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혁신 중국'이라 불러야 할 신산업 생태계다.
한쪽에서 열심히 베끼면서도 다른 쪽에선 첨단을 달린다.
모방과 혁신이 공존하는 것이 지금의 중국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에서 중국발(發) 혁신은 충격적이다.
드론의 세계 최강자는 중국이다. '드론계의 애플'이라는 DJI가 세계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중국 드론 업체를 다 합치면 점유율은 90%까지 올라간다. 모바일 결제에서도 중국은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애플의 모바일 결제 서비스가 중국을 베꼈다는 논란이 일 정도다.
과학 논문 인용에서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갔다. 컴퓨터공학·재료과학 등 4개 분야는 미국을 앞선다.
얼마 전 중국과학원은 배아줄기세포를 활용한 파킨슨병 임상 실험 계획을 발표했다. 이것 역시 세계 최초다.
이런 사례들은 하도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조선일보 DB
우리는 중국의 혁신을 목격할 때마다 '대륙의 실수'로 폄하한다. 확실히 중국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모방 경제권에 속해 있다.
그러나 중국이 13억의 초거대 경제임을 잊어선 안 된다. 5%만 혁신해도 인구로 치면 6500만이다.
우리를 가볍게 넘어서는 규모다. 양과 질 모두 우리를 압도하는 '혁신 중국'이 코앞에 와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래도 중국에 큰소리치는 것은 산업기술의 우위 덕이다. 그 우위가 사라지는 순간 중국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
중국을 베끼며 짝퉁이나 만들게 될지 모른다. 경제만의 얘기가 아니다. 중국은 패권(覇權)의 유전자를 지닌 나라다.
경제의 우위를 빼앗기면 안보도 외교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중국에 맞설 국가 전략이 궁색해진다.
안보엔 동맹이 있지만 경제엔 없다. 우리의 유일한 생존법은 끊임없이 중국 앞을 달리는 길뿐이다.
혁신의 힘으로 산업기술 우위를 지켜내야 한다. 질의 경쟁에서 뒤지는 순간 중국에 종속되고 만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숙명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자해극 같은 상황이다. 기업이나 연구개발자 능력은 우리가 지지 않는다.
신산업 경쟁을 뒤처지게 하는 주범은 정부다.
정부가 틀어쥔 규제가 드론을 못 띄우게 막고 원격(遠隔) 의료와 빅데이터 산업에 족쇄를 채웠다.
새로 열리는 신산업 분야는 죄다 규제 사슬로 얽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 스스로 자기 발목을 잡고 있다.
이 규제들은 4차 산업혁명은 꿈도 못 꿀 시절에 만든 것들이다. 당연히 중국엔 없다.
죽을 힘을 다해도 모자랄 판인데 한 발 묶고 뛰겠다는 격이다.
이래 놓고도 뒤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문재인 정부도 4차 산업혁명을 하겠다 한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규제 개혁은 말하지 않는다.
혁신 전략은커녕 내놓는 정책마다 혁신을 죽이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지금 추세라면 정권 5년 임기 안에 '혁신 중국'에 추월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신산업 분야 대부분에서 중국에 뒤지게 될 것이다.
남이 잘해서 앞서 나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추월을 자초한다면 바보나 다름없다.
그런 자해극을 지금 우리 정부가 하고 있다.
중국을 베끼며 살 5년 뒤를 생각하면 문 대통령 등골이 서늘해져야 마땅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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