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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바닷가 마을 음악 축제

바람아님 2017. 6. 27. 08:42

(조선일보 2017.06.27 김정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2바이올린 부수석)


김정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2바이올린 부수석잉글랜드 동부 서퍽 지방의 스네이프 마을에서 열리는 '올드버러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1913~1976)이 살던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1948년에 시작된 

음악 축제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길을 안내하고, 주차를 돕고, 연주회 프로그램을 나눠주는 

지역 주민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역력했다. 그들의 삶의 터전인 서퍽 지방의 햇빛과 구름과 바람, 

푸른 보리밭, 숲을 이룬 갈대, 강과 바다는 벤저민 브리튼에게 평생 영감의 원천이었다. 

브리튼의 예술과 서퍽의 자연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그곳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이 페스티벌의 주 공연장 스네이프 몰팅스는 1800년대부터 보리로 엿기름을 만들던 공장 건물이다. 

에어컨이 없고 대기실도 부족하지만, 이 동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했고, 무엇보다 자연에 가까이 있다. 

작곡가도, 연주자도, 청중도 틈이 나면 브리튼이 날마다 산책했던 가까운 바닷가를 찾아가서 걷는다. 

예술가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정신과 음악은 살아 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오늘날도 작곡가들이 이곳에 머물며 곡을 쓰고, 페스티벌을 통해 새 작품을 발표한다. 

갈매기가 비명처럼 질러 대는 소리, 파도가 밀려와 자갈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다 보니 

불협화음이나 복잡하고 불규칙한 리듬이 결코 현대 음악의 발명품도, 전유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소리는 항상 삶의 한 부분이다. 음악과 소음의 경계도 뚜렷하지 않다

올드버러에서 들은 음악에서는 바람 소리, 새소리, 물소리가 났다.


공연장 앞에 나지막이 놓인 의자에 앉으니 너른 들판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그 위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름의 무늬를 오래 바라보았다. 

음악이 아닌데도 음악 같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예술가가 사랑했던 곳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듣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새로운 음악이 태어나고, 과거에 쓰인 음악이 연주를 통해 되살아나는 것은 모든 소리를 품고 

모든 것에 자리를 내주는 자연의 넉넉함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