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 논설위원
정치·안보·경제 가리지 않고 전 분야가 혼란스럽다. 무더위에 장마까지 겹쳤다. 이럴수록 인간의 내면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에 대한 경탄을 일컬어 그리스도교라고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인간을 신앙의 중심에 놓았다. 인간 중심 신앙은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에 의해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김형진(60) 변호사가 최근 출간한 ‘도스토예프스키 만나다’를 보면 그런 평가에 고개가 끄떡여진다. 종교 개혁과 프랑스 혁명 이전의 인간은 신의 도구였을 뿐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혁명 이후 판도라 상자 안 인간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펼쳐내 보였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신의 질서에 의문을 던지거나,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믿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 ‘까라마조프 형제들’의 이반 대(對) 알료샤, 조시마 장로이다. 그중 이반의 ‘신에 대한 도전’은 지금도 유효하다. 신은 왜 의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을 위해 지금 여기 지상에서 죄 없는 사람들, 특히 순진무구한 어린이들까지 고통과 죽음을 당하도록 용인하는가. 신은 왜 인간에게 빵을 만들어 주거나 기적을 일으켜 노예적 환희나 복종을 일으키지 않고, 기적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인 자유를 부여했는가. 원래 반역적·노예적인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해 자유를 감당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더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독자성과 존엄성은 욕망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게 됐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을 자유로 보았다. 그에게 자유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이자 목표였다. 그런데 자유는 선택이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따라서 신이 자유를 부여한 의미는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이었고, 자유를 얻게 된 인간은 타인들과 함께 지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 자신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규범도 제시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제기한 문제들은 우리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또 거기에 답변해야만 한다. 저자는 동양의 고전과 서양 철학의 핵심들을 요약해 제시한다. 종교와 철학, 문학의 본질에 대한 촌철살인의 글들도 유익하다. 한여름은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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