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7.19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보물 제339호 서봉총 금관. 높이(새모양 장식 포함) 30.7㎝.
/국립중앙박물관
1926년 10월 10일 일요일.
경주 노서리 129호분 발굴단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귀빈 방문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10시쯤 도착한 귀빈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와 황태자비(妃) 루이즈 마운트배튼. 황태자 부부는 차에서 내려 초가집으로
둘러싸인 발굴 현장에 들어섰다. 돌무지가 가득했고 한가운데에 나무 판재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금관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만, 현장에선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조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판재를 제거하니 그 아래에 흰색 천이 덮여 있었고 천까지
제거하자 청명한 가을볕을 받으며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 황금보관(黃金寶冠)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뿐 아니라 수행원들까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교토대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금관이 새로 나온 게 확실하죠?"라 묻자 황태자는 "정말이네요"라고
대답했다. 며칠 전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금관 발굴 소식을 처음 듣자마자 황태자가 "박물관 금관을 가져다 묻어놓은 건
아니겠죠?"라고 농담했던 것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황태자는 발굴단의 요청을 받고 금관을 직접 수습해 들어 올렸다.
발굴 책임자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황태자에게 무덤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황태자는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 꼭대기에 부착된 봉황 모양 장식에서 '봉'자를 뽑아 '서봉총'이라 제안했다. 노서리 129호분은 새 이름을 갖게 됐고 1921년의 금관총, 1924년의 금령총에 이어 금관이 출토된 세 번째 신라고분으로 기록됐다.
서봉총 금관은 발굴 한 달 만에 서울로 옮겨져 일반에 공개됐다. 1935년에는 평양박물관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이 전시회가 끝난 후 당시 평양박물관장이던 고이즈미가 파티를 열고 금관을 기생의 머리에 씌우고 찍은 사진이 신문에
공개돼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1949년 5월에는 국립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전시된 서봉총 금관을 훔쳐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이 금관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무덤의 규모나 함께 출토된 유물의 종류로 보아 신라의 왕비나 공주로 보는 견해가 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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