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0.02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전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저자
외교관 시절의 일이다. 2004년 여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국제회의를 계기로 마련된 한·니카라과
외교장관 회담에 실무 배석을 하였다. 당시 반기문 전 장관의 일정이 빡빡했지만, 자투리 시간에라도
꼭 만나고 싶다는 니카라과 측의 요청으로 회담이 성사되었다.
회담이 시작되자 니카라과 측 외교장관이 회담에 응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수북한 수염과 온화한 외모가 인상적인 노신사였다. 매우 정확하고 품격 높은 영어를 구사하는데,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오래 하다가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가 외교장관의 중책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니카라과는
수십 년을 끌어온 내전에 종지부를 찍고 피폐해진 국가의 재건을 위한 국제사회의 도움과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 노신사 외교장관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어딘가 슬픔이 묻어 있는 눈망울을 그렁그렁하며, 진정성과 간절함을 담아 차분한 어조로 조국 니카라과의
재건을 바라는 일념, 그를 위한 한국의 경험 공유와 지원에 대한 요망을 전하는데, 회담 내내 숙연한 기분이 되어
그의 말을 경청했던 기억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내면의 울림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곤경에 처해 있더라도 성의(integrity)와 존엄(dignity)으로 임하는 사람의 말은 경청하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반 장관도 같은 느낌이었는지 회담 후 니카라과에 대한 지원을 적극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날 밤,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보고 전문을 썼다. 그의 진정성과 열정이 서울에 전해지고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고치고 또 고치며 밤늦도록 전문 작성에 매달리는 것으로 그에 대한 나의 경의를 표하였다.
그때 세상일이 돌아가는 원리와 이치의 일면을 깨달았다.
해방 이후 한국의 지도자와 외교관들이 처한 현실과 걸어온 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왠지 그 시대를 살아낸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 추석 연휴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전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의 글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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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일사일언' 필자는 신상목씨를 비롯, 추리소설 쓰는 변호사 도진기씨, 양경미 영화평론가, 문용민 음악평론가, 권제훈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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