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전문기자 칼럼] 리영희를 읽으면 '北核 촛불 민심'이 보인다

바람아님 2017. 10. 12. 08:48
조선일보 2017.10.11. 03:14

일부 좌파 '촛불 민심'이라며 방법론 없이 "평화"만 외쳐
"북핵 자위용, 미군 철수" 주장한 리 교수를 여전히 '師表' 삼는가
이선민 선임기자

북핵(北核) 위기가 고조되면서 이와 관련해 '촛불 민심'을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대통령과 정부가 다 말하지 못하는 촛불 민심을 전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했다. 진보좌파의 '숨은 신(神)'으로 중요한 고비마다 방향을 제시해온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이 아니라 촛불 혁명의 통로가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소설가 한강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촛불 혁명으로 사회를 변화시킨 한국인들은 북핵 문제도 그런 방식으로 해결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북핵 문제에 대한 '촛불 민심'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난겨울부터 올봄까지 전국을 달구었던 '촛불 집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저항이었지 북핵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북핵 위기가 본격화된 뒤 '촛불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촛불 집회'에 참가했던 많은 국민의 북핵에 관한 생각은 그 주도 세력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지금 '북핵 촛불 집회'를 열면 얼마나 모일까. 일부 좌파 세력이 말하는 '북핵 촛불 민심'은 그들의 마음을 포장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북핵에 대한 의견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들이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것은 오직 하나 '평화'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 폐기를 위한 대화를 거부하고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평화를 어떻게 달성할지 방법론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을 아끼는 '북핵 촛불 민심'을 알고 싶다면 그들로부터 '사상(思想)의 은사(恩師)'로 추앙받았던 고(故) 리영희 교수의 북핵 관련 발언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고 리영희 한양대 교수. /조선일보 DB

1970~1980년대 베트남 전쟁과 중국현대사를 다룬 저서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리영희 교수는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저술 활동은 접었지만 강연과 인터뷰를 통해 북핵,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 등 한반도의 핵심 안보 현안에 대해 발언했다. 리 교수는 북핵을 '미국의 공격에 대한 자위책'이라고 봤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주던 소련의 보호막이 한·소 수교로 제거되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그는 주한미군의 목적은 한국 방위 보다는 미국의 동북아 패권 유지라고 했다. 한·미 동맹은 완전히 속국(屬國) 조약이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한국군은 용병(傭兵)으로 미국 군대에 편입돼 북한과의 전쟁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리영희 교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한·미 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남북한의 단계적 군축→영세 중립국 수립'을 주장했다. 전시작전권 환수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방책이라고도 했다. 그는 이런 구상을 냉전 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발상의 대전환'이라고 불렀다. 리 교수는 자신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당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가 뿌린 씨앗이 무성한 꽃과 잎으로 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리영희 선생"이라고 썼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한 언론이 '국민과 널리 함께 읽고 싶은 책'을 물었을 때 리 교수의 대표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꼽았다. 리 교수의 빈소를 찾아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배우고 큰 사표(師表)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최고 지도자가 돼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리 교수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지지 세력으로부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근본적이고 창의적인 해법' '북핵 촛불 민심의 수용'을 요구받고 있는 문 대통령이 설마 대한민국의 근본 틀을 뒤흔드는 주장에 현혹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