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공론조사와 적폐 청산, 방송국 이사 퇴진 압력 등
잇단 부정적인 이미지 쌓아.. 때로는 참을 줄도 알아야
자신을 스카우트할지 모르는 사람이 청중석에서 지켜볼 때 운동선수는 더 열심히 뛴다. 최상의 컨디션 관리와 결의에 찬 표정은 기본, 최고의 기량을 뽐내기 위한 과도한 몸짓도 불사한다. 선수에겐 팀이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실력이 도드라져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 선수가 하고 있는 건 '인상 관리'다.
흔하고 뻔한 현상을 학자들이 어려운 이론으로 설명할 때가 더러 있다. 인간의 사회적 자아를 설명하기 위한 '인상 관리 이론'도 그중 하나다. 사람은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사회적 기대를 파악하고 특정 행동을 결정하는데,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은 기대와 이미지를 종종 설득에 이용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보여주기에 강하고 동시에 남의 시선에 취약하다.
신고리 원전 관련 공론조사가 한창 진행 중일 무렵 청와대는 '탈원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탈원전'이라는 말이 마치 일거에 원자력을 포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게 그 이유다. 단어의 프레임 짓기 위력을 아는 정부의 미세 관리다.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까지 설치한 정부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기관에 내려 보내며 아예 무기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말라는 지침도 함께 내렸다고 한다. 정부가 대신 권고한 표현은 '공무직' 혹은 '업무직'이었다. 그러니까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과 동시에 '비정규직'이라는 말도 함께 없애는 디테일을 선보였다.
문제는 한정된 예산 탓에 늘어난 인건비만큼 사업비를 줄여야 하는 기관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일할 사람이 늘어난 만큼 일이 줄었다. 줄어든 일을 더 많은 사람이 나눠서 정년까지 하니 하늘이 내린 직장이 따로 없다. 나랏돈으로 운영하는 공공기관이야 일 좀 적게 해도 문 닫을 걱정이 없겠지만, 매일 일정량의 노동을 투입해야 굴러가는 자영업자들은 무슨 수로 줄어든 노동을 메울지 딱하다.
하기야 지난 정부가 인상 관리만 제대로 했어도 사정이 좀 달라졌을지 모른다. 세월호 사고가 나자마자 대통령이 소통에 발 벗고 나서 함께 아파하는 인상을 주고, 문고리 3인방과 핵심 친박 세력을 후퇴시켜 민심을 두려워하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탄핵까지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정부의 인상 관리는 프로급이지만 들여다보면 허점도 적지 않다. 89일 동안 46억원을 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시민참여단의 공론조사 결과 '건설 재개'로 결정하면서 새 정부발 원전 갈등이 일단락되었으나 정부는 스스로 져야 할 정책 결정의 부담을 시민에게 떠맡긴다는 인상을 남겼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숙의 민주주의의 과정이었지만, 건설 중단에 따른 1000억원의 비용은 관람료치곤 지나치게 비쌌다.
적폐를 청산하겠다며 과거 보수 정부의 크고 작은 잘못을 풀어내 보이는 건 정치 보복의 인상을 준다. 적폐란 보수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그동안 구석구석에 관행과 관습으로 켜켜이 쌓여 있던 구시대적 폐단을 총칭한다. 그걸 손보기 위해선 그런 적폐를 양산한 시스템을 고치고 스스로 솔선수범하며 새 틀을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미래를 지향하는 정부란 느낌을 준다.
최근 안보 관련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 대통령의 말은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수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 주변 강대국으로 더 동분서주하는 모습으로 외교 전선이 건재하다는 인상을 주고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
누구보다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구여권의 추천으로 공영방송 업무에 관여해 온 이사진일 것이다. 임기가 남아 있는 그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퇴진 압력을 받고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있다. 그중에는 정상적인 직장 업무가 불가능하거나 집 앞에 오물이 투척되는 꼴을 겪는 사람도 있다. 설령 과거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현 정권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면 결국 똑같은 수준이 된다. 정부는 현재 방송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권의 이해에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존중해 현 이사진의 임기를 보장하고 정치 입김으로부터 방송을 보호하는 입법을 서두르는 정도의 제스처를 보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민주정부의 인상을 유지하며 공영방송을 장악하려 한다는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인상을 관리하려면 때론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 하고 참을성도 필요하다.
정부의 인상 관리는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데 유용하지만 정부는 결국 실적으로 말해야 한다. 당장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 당장 청년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얻는 것, 그리고 우리가 딛고 선 땅에서 전쟁을 막는 것은 엄중한 현실의 영역이다. 그 힘 좋다는 이미지나 프레임도 현실 앞에서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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