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특파원 리포트] 일본이 트럼프를 작심하고 환대한 까닭

바람아님 2017. 11. 7. 12:09

(조선일보 2017.11.07 김수혜 도쿄 특파원)


日도 50년 전엔 反美 데모, 지금은 "트럼프와 함께해야"
10~20년 후 미래 보기 때문… 中 대비 '안보 스크럼' 구상


김수혜 도쿄 특파원김수혜 도쿄 특파원


1967년 11월엔 도쿄도 서울만큼 시끄러웠다.

'6·8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 여름 내내 열병을 앓은 서울보다 어쩌면 도쿄 쪽이 더했을지 모른다.

아직 미군이 점령 중이던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달라는 데모, 베트남 인민을 지지한다는 데모,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의 방미를 결사 저지하자는 데모가 하루가 멀다 하고

도쿄 나가타초 총리관저 앞에서 일어났다. 반전 반미를 외치던 시위대원이 관저 앞에서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자살한 게 이때였다. 일본 정부가 미국의 베트남 폭격을 지지한 데 항의하는 데모였다.


조선일보 도쿄지국은 그런 일이 벌어졌던 현장과 뛰면 10분, 걸으면 20분 걸리는 자리에 있다.

맨해튼 뺨치게 솟아오른 마루노우치 마천루가 오른쪽, 50년 전 살벌한 데모가 벌어진 총리관저가 왼쪽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 머무른 2박 3일 동안, 눈에 보이는 어디에서도 옛 얘기는 꿈같았다.

서울은 투석전만 없지 반미 데모가 줄줄이 예정돼 있다는데, 도쿄는 어딜 가나 들뜬 분위기였다.


일본 정부가 경찰 2만1000명을 동원해 미·일 정상이 지나는 주요 길목에 배치했지만,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하자는 취지였지,

일본 시위대가 "트럼프 가라"고 외칠까봐 취한 조치는 아니었다.

확성기를 켜고 시내를 빙빙 돌며 혐한 폭언을 퍼붓는 우익 차량도 이 기간엔 잠잠했다.


점심·저녁때 만난 일본인들은 "경계경비 때문에 평소 길이 막힌다"고 기쁜 얼굴로 불평했다.

"트럼프랑 아베랑 저녁 먹었다는 긴자 철판구이집 언제 한번 가보고 싶다"

"둘이 골프 친 가스미가세키 골프장이 참 풍광 좋더라"는 얘기를 더 오래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도널드와 신조'라고 금실로 수놓은 흰 모자를 나눠 쓰고 골프 치는 장면을 보며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마음 가볍게 웃을 수 없다. 우리 눈엔 되레 아베 총리의 환대도, 일본 국내의 트럼프 붐도 어딘가 이상하게 비치기 쉽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트럼프는 '김정은 못지않게 위험한 사람' '책임지지도 않을 허풍으로 한국 주가 떨어뜨리는 사람'

'그 와중에 아베 총리랑 친해서 더 얄미운 사람'이라 여긴다.


우리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트럼프만큼 욕할 소재가 풍부한 사람도 없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막말과 오만으로 이만큼 세계인의 야유를 받은 사람이 없다. 미국 기자 중에서도 "트럼프 잘한다"고

편들어주는 사람을 거의 못 봤다. 최순실 사태로 한국이 시끄러울 때 베테랑 미국 기자에게 "옳고 그름을 떠나 창피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상대가 "트럼프 뽑은 우리도 있는데 뭘 그러냐"고 위로해 둘이 같이 실소했다.


그런데도 일본인이 이방카에 열광하고 트럼프에게 손을 흔드는 건, 우리만 자존심이 있고 일본은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일본을 수년 지켜본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벌써 수년 전부터 "일본이 하는 모든 행동의 배경엔 중국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과 오래 깊게 교유해 온 한국 정치인, 현장에서 뼈가 굵은 외교관, 군사문제 연구하는 중견 학자가

하나같이 같은 얘기를 했다.


가까운 데 있는 중국이 점점 거인으로 떠오르니까, 먼 데 있는 미국과 더 강하게 손을 잡고 인도와 호주까지 끌어들여

'미·일·인·호' 스크럼을 짜겠다는 게 아베 총리의 전략이고 세계관이다.

그는 지난 2월 트럼프에게 단기적으론 북한이 위협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이 위협"이라고 했다.


문제는 트럼프도 같은 생각이라는 현실에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좀처럼 눈을 뜨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이방카 고문이 아버지에게 '외교·안보는 아베 총리가 하자는 대로 하라'고 충고했다"고 전했다.

백악관 내에 "트럼프 대통령 외교 보좌관은 아베 총리"라는 농담도 돈다고 한다.

'내 친구 신조와 와규 먹고 한국에 간 드널드'를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