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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 한국의 정, 일본의 와, 중국의 관시/ [1] 은행이 징코가 된 까닭

바람아님 2017. 11. 24. 10:13

(조선일보 2017.11.24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 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민족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는 별론으로 하고, 한·중·일 삼국의 정서적 특질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있다면,

중국은 '관시(關係)', 한국은 '정(情)', 일본은 '와(和)'일 것이다.

모두 덕(virtue)으로서의 장점이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악덕(vice)으로 변질될 수 있는 이중성이 있다.


중국의 '관시'는 관심(關心)을 주고받는 사이를 뜻한다.

중국어의 관심은 '흥미(interest)'라는 의미도 있지만, '챙기는 마음(caring mind)'의 뜻이 앞선다.

따라서 중국에서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은 서로 관심을 두는, 즉 챙기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관계가 없으면 서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에서의 무관심은 '흥미가 없음'을 넘어 '나는 너를 챙기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2] 한국의 정, 일본의 와, 중국의 관시


한국의 '정'은 나눔의 정서이다. '구분하고 끊는 것'보다 '나누고 잇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나누고 이어야 사람 도리를 한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면 사람 도리가 시원치 않아 덧정 없다는 말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눔의 정과 맺고 끊음이 흐릿한 온정주의 사이의 경계선은 때때로 희미하다.

일본의 '와'는 전체를 중심으로 서로 구속되는 것이다.

'와'는 둥글고 균열이 없음을 의미하며, 삐져나오거나 다투는 상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정해진 규칙에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을 구성원의 첫째 덕목으로, 그에 서로 구속됨을 사회의 근간으로 삼는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불화(不和)를 야기하는 구성원은 시시비비를 떠나 배신자로 비난받고 배척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중·일의 상호 교류와 이해가 증진돼 서로 관계를 맺되 관계가 없어도 관심을 갖고, 정을 나누되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규칙을 따르고 원만하게 지내되 보다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미래를 꿈꿔본다.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 은행이 징코가 된 까닭


(조선일보 2017.11.10 신상목 前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가을은 은행나무가 단풍으로 곱게 물드는 계절이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일컫는 독특한 식물이다.

비슷한 종(種)은 오래전에 멸종했지만 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유럽 언어권에서 Ginkgo(징코)라고 한다. 이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 은행이 징코가 된 까닭


독일 태생의 식물학자이자 의사였던 엥겔베르트 켐퍼(Engelbert Kaempfer· 1651~1716)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의사로

고용되어 1690년부터 1692년까지 일본의 나가사키에 체류했다. 1695년 고향에 돌아간 그는 일본,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1712년 '회국기관'(廻國奇觀·Amoenitates Exoticae)이라는

박물지(博物誌)를 출간했다. 당시 유럽에는 은행나무가 없었고, 유럽인들은 은행나무가 멸종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에 와서 살아있는 은행나무를 발견한 켐퍼는 그 놀라운 사실을 '회국기관'에 소개하면서 이름을 'Ginkgo'라고 적었다.

훗날 현대 생물 분류학의 아버지라는 린네(Carl von Linné)가 이를 참고로 은행나무의 학명을 지으면서 Ginkgo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Ginkgo는 철자도 이상하고, 이를 '징코'라고 읽는 것도 이상하다.

후세 학자들은 Ginkgo가 'Ginkyo'(긴쿄)의 오기(誤記)일 것으로 추측한다. 긴쿄는 은행(銀杏)의 일본어 발음이다.

독일어식 표기법을 감안하더라도 Ginkjo 또는 Ginkio로 적어야 하는 것을 켐퍼가 Ginkgo라고 오기하는 바람에 어색한

스펠링과 발음의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마치 포르투갈어의 팡(pão)이 일본에 전래하면서 '빵'이 되었듯이, 유럽과

일본의 교류 초기에 서로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정에서 나온 재미있는 동서양 간 이름 교류의 한 사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