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예측 못한 '돌연변이'가 역사를 바꿨네 외 2

바람아님 2017. 12. 23. 15:20


 

 예측 못한 '돌연변이'가 역사를 바꿨네


(조선일보 2017.12.22 유석재 기자)


예측 못한 '돌연변이'가 역사를 바꿨네문명은 부산물이다 | 정예푸 지음|오한나 옮김 | 378|528쪽|2만2000원


우리는 종이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중국 후한의 채륜(蔡倫)이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기록 문화를 촉진해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채륜 이전의 '고대 종이'는 중국에서만 아홉 번 발견됐다.

그것들이 모두 애초에 필기를 위한 발명품이었을 것 같진 않고, 그냥 포장이나 받침 용도의

두루마기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은 '아, 이 두루마기가 글씨를 쓰기에도

좋구나!'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럼 채륜은? 그가 과연 '문명의 유구한 발전'을 내다보고 종이를 본격적으로 발명하는 사명을

맡았던 것일까. 전 베이징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2016년 이 책(원제

'文明是副産品')을 쓴 저자 정예푸(鄭也夫)는 이렇게 본다. 채륜은 고향인 옛 초(楚)나라 땅에서 묘족(苗族)들이 나무껍질로

만드는 헝겊인 수피포(樹皮布)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피포 제작 과정에서 부산물인 '수피지'가 쉽게 나왔고,

여기서 영감을 얻은 채륜은 그때까지 글자를 적기 위해 쓰던 비단만큼이나 매끄럽고 윤이 나는 고품질 종이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부산물이 역사를 바꾼 셈이다.


예측 못한 '돌연변이'가 역사를 바꿨네후한의 채륜이 나무껍질 등을 이용해 종이를 만드는 모습을

그린 현대 중국의 상상도. / 조선일보 DB


저자는 "문명은 계획할 수도 없으며 인류의 목적적 행위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말한다.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대개 사람들의 의도에서 몇 발짝 벗어난

부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족외혼(族外婚), 농업, 문자, 제지(製紙), 조판 인쇄,

활판 인쇄의 여섯 가지 사례를 통해 이를 논증한다.


예를 들어 다른 씨족이나 부족으로부터 배우자를 데려오는 제도인 족외혼은

근친혼의 생물학적 위험을 방지하려는 거시적 계획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익히 봐온

이성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성적(性的) 요인과 촌수가 흐트러져 질서가

잡히지 않는 일을 우려한 정치제도적 요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부산물이

인류 구성원의 교환과 협력 관계라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위대한 군주나 정책이 아니라 인간과 부산물의

'상호 작용'이야말로 문명을 변천시켜 온 진짜 원동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농업에 종사하면서 그 농업이 인간을 한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았다. 인공지능(AI)을 만들어 놓고서도 그 예상할 수 없는 효과에 두려워하는 요즘 인류를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지 않은가. 중국 책으로선 드물게 중화주의를 벗어난 이 책은 새로운 생각을 권한다.

문명의 기원을 따지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기보다는 인간 자체를 냉철하게 바라보라는 것, 그리고 역사가 반드시

진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조선일보 2017.12.22 채민기 기자)


샤이니 종현의 죽음… 뒤르켐이 틀렸다


샤이니 종현의 죽음… 뒤르켐이 틀렸다자살의 사회학 | 마르치오 바르발리 지음 | 박우정 옮김|글항아리 | 604쪽|2만9800원


아이돌 그룹 '샤이니' 멤버 종현(본명 김종현·27)은 '끝낸다는 말은 쉽다. 끝내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에 여지껏 살았다' 내용의 유서를 남겨놓고 지난 18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지인을 통해 공개한 유서엔 '왜요? 난 왜 내 마음대로 끝도 못맺게 해요?'라는 표현도 있었다.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가장 권위 있는 자살 관련 연구의 맹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탈리아 사회학자인 저자는 자살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의 이정표였던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1897)을 논박한다. 역사의 진보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가

'더욱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자살에 대한 비난도 커진다고 봤던 뒤르켐의 주장을 뒤집는다.

'자발적 죽음에 대한 도덕적 접근 방식에 위기가 온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중략) 세상과 작별하는 때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눈뜬 것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샤이니 종현의 죽음… 뒤르켐이 틀렸다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가 미국 여배우 도로시 헤일을 묘사한 작품

‘도로시 헤일의 자살’(1939). / 글항아리


학문은 선배들의 연구를 디딤돌 삼아 발돋움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사회의 '통합'과 '규제'를 변수로 놓고 현대의 자살률 변화를 내다본

뒤르켐의 예측이 유효하지 않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뒤르켐은 갈수록 통합이 약해지기 때문에 집단에 철저하게 종속된 개인의

'이타적 자살'(과거 인도에서 죽은 남편을 따라 아내가 자결하던 '사티' 풍습이

대표적 사례다)은 점차 줄어들 것으로 봤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도 정치적 목적의

분신(焚身) 같은 형태로 이타적 자살은 계속됐다.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나

9·11 테러처럼 새로운 유형의 이타적 자살도 등장했다.


따라서 자살의 유형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통합과 규제라는 변수 대신 '누군가를 위한 자살'과 '누군가에게 대항하는 자살'로

크게 나누고, 전자는 다시 이기적 자살(나를 위한 자살)과 이타적 자살(타인을 위한

자살), 후자는 공격적 자살(개인적으로 타인을 해치려는 자살)과 무기로서의 자살(종교적·정치적 테러 등)로 분류한다.


젊은 K팝 스타의 안타까운 죽음은 어느 지점에 있을까.

생전 우울증을 앓았다는 그는 유서에서 '막히는 숨을 틔워줄 수 없다면 차라리 멈추는 게 나아'라고 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이기적 자살, 즉 '다양한 원인으로 인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끝내기 위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목숨을 끊는'

경우였을까.

눈길을 끄는 건 저자가 "탄탄한 관계망에 소속돼 다양한 지원을 받는 사람들은 역경이 닥쳐도 자살할 위험이 더 낮다"

점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비슷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국 남은 이들 모두의 공동 책임인 셈이다.
                    
 


도쿄대 文靑들은 왜 일본 전시체제를 옹호했나


(조선일보 2017.12.22 양지호 기자)


문학가라는 병문학가라는 병

다카다 리에코 지음|김경원 옮김|이마|348쪽/ 1만7000원


"앞으로 히틀러 총통이 어떤 기발한 정책으로 '나의 투쟁'인 동방 정책을 실현해 나갈지 한없는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20세기 초반 일본에서는 헤르만 헤세에 열광했던 문청(文靑)들이

히틀러를 옹호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정작 헤세는 나치에 반대하며 스위스로 망명했는데 말이다.

다카다 리에코(59) 모모야마학원대학 교수는 독문학에 열광했던 일본 도쿄대 문학부 출신 청년들이

일본 전시 체제와 나치의 옹호자로 변화한 맥락을 추적한다.

저자는 '속세의 욕망을 내던진 삶을 보여 주려는 허영심'으로 문학을 선택한 이들이 결국 출세욕과

명예욕 앞에서 결국 나치 문학을 번역하고 찬양하게 됐다고 봤다. 엘리트였으나 법학부를 나오지 못했기에 이류라고

자조했던 이들, 세속적이지 않고자 하였으나 현실적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청년들의 굴곡진 모습이다.

일본 문청의 실패가 그들 나라, 그들 세대만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