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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麗水漫漫] '어머 오빠!', 그리고 '좋아요!'

바람아님 2017. 12. 27. 10:32

(조선일보 2017.12.27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돈·권력 있다고 상대를 무시하는 표정 짓는 사람들
'갑질' '모멸감' 느끼게 하는 건 이념 아닌 윤리 문제
近代 토대는 상호 인정… 새해엔 서로 무시 맙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몇 년 전부터 내겐 심리적 '기피 인물'이 생겼다.

신문 전면에 그의 사진이 등장하면 아예 그날 신문은 건너뛴다.

그의 모습이 TV 뉴스에 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린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다.

'사드'로 인한 중국의 치사한 경제 보복 때문이 아니다. 훨씬 이전부터 그랬다.

최근 어느 기업 사장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시진핑이 계속 떠올랐다.

그 나름대로 알짜 기업을 몇 대째 이어 간다는 그의 표정은 시진핑과 몹시 닮아 있었다.


'리스펙트(respect)'의 부재였다.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그 어떤 '존중'의 단서도 발견되지 않는 그 사장의 표정에 나는 몹시 기분 상했던 것이다.

내 주위에는 자신의 '존귀와 위엄'을 지키느라 그 어떤 정서적 단서도 제시하지 않는 '시진핑식 표정'이 무척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진 재산이 삶의 전부인 줄 아는 그 사장만이 아니다.

멀쩡한 이들도 권력만 쥐면 신기하게 표정이 바뀐다.

방송이나 학술 토론장에서 어쩌다 부딪치는 '나름 지식인'들도 죄다 '시진핑식 표정'이다(그래서 나는 오전에 사장, 교수,

고위 공무원은 절대 안 만난다. 떨떠름한 그들의 표정 때문에 내 하루가 완전 망가진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따위 표정으로 구현하는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 오래된 독일 생활에서 참 많이 들었던 단어가 '리스펙트'다. 이에 상응하는 한국어는 '존경' '존중'쯤이 된다.

그러나 '존경' '존중'은 어딘가에 '상하 관계'가 숨겨져 있다. '리스펙트'의 화용론(話用論)은 사뭇 다르다.

'수평적 상호작용'의 구체적 전제 조건이 되는 '인정(Anerkennung)'의 맥락에서 쓰이는 단어다.

'나는 당신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혹은 '나는 당신 의견을 듣고 내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열린 상호작용의 규칙이 바로 '리스펙트'다. 서구사회의 일상에서 강조되는 '매너' 혹은 '교양'이란 바로 이 리스펙트의

활용 규칙이다. 내가 유학 시절 숱하게 독일인들과 부딪쳤던 이유는 그 '리스펙트'의 규칙이 자기들끼리만 적용될 뿐,

키 작고 얼굴 노란 동양인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 오빠!'
'어머 오빠!' /그림 김정운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서구의 근대화는 이 '리스펙트'를 제도와 관습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정 투쟁(Kampf um Anerkennung)'으로 설명한다.

사실 '인정 투쟁' 개념은 청년기의 헤겔 철학에서만 잠시 서술된 개념이다.

'인정 투쟁'을 현대 정치철학적, 문화심리학적 담론의 영역으로 새롭게 끌어올린 이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악셀 호네트 교수다. 마키아벨리나 홉스의 이론이 전제하는 '원자적 개인'은 생존 투쟁을 본질로 한다. 그러나 헤겔은 인간을 '상호작용'에 근거한

'공동체적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은 '상호 인정'이라는 상호 주관적 틀에서만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법과 규칙들은 바로 이 같은 상호 인정의 토대로 마련되었고, 각 개인의 '생존 투쟁'은 상호 간의

'인정 투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분석의 단위가 '개인'에서 '관계'로 바뀌면서 헤겔의 '인정 투쟁'은 심리학적 개념이 된다.

상호 인정과 자기 존중의 심리학적 구조는 본질상 같기 때문이다. '자기 존중'이란 '주격 나(I)'와 '목적격 나(Me)'의

상호 인정이다. 그래서 무시당하는 것처럼 세상에 기분 나쁜 일은 없다.

내 존재 자체를 통째로 부정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까? 어찌 저항하지 않을까?


세계사의 전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통해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부를 얻었다.

그러나 상호 인정의 규칙을 제도화하고 실천하는 일은 건너뛰었다.

당시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한국 사회의 엄청난 사건들은 그렇게 생략하고 건너뛰어도 될 줄 알았던 '상호 인정'이라는

근대 시민사회의 근본 원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긴급한 요청이었다.

그래서 '갑질' '무시' '모멸감'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담론과 '산업화 세대'의 급격한 정치적 몰락은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였다는 거다.


서구사회는 이 '리스펙트'의 규칙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화했다. 대인 관계의 기술로는 '감탄사' 남용이다.

그들의 대화를 잘 들여다보면 감탄사가 끊임없다.

'wonderful!' 'awesome!' 'really?'와 같은 단어와 감탄의 표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나는 당신을 리스펙트한다'는 상호 인정 규칙의 실천인 것이다.

그저 습관인 줄 알면서도 인정받는 느낌에 기분 좋아진다.


한국 사회에서 매너와 교양으로 미처 자리 잡지 못한 리스펙트의 규칙은 오늘날 아주 희한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어머 오빠!'라는 싸구려 감탄사에 사내들은 밤마다 지하에서 지갑을 열며 어처구니없는 '인정 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뭐, 그렇다고 철없는 사내들만 욕할 일은 아니다.

소셜미디어의 '좋아요'나 '엄지 척' 또한 술집 여인들의 '어머 오빠!'와 그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소셜미디어는 '상호 인정' 규칙을 왜곡하고 파괴한다.

오죽하면 페이스북을 창립부터 이끌었던 2인자가 최근 퇴사한 후, 페이스북의 '좋아요'가 술, 도박, 마약과 같은

'도파민에 의한 단기 피드백의 올가미(short-term dopamine-driven feedback loop)'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이야말로

인간 사회가 작동하는 '근본 규칙'을 망가뜨린 장본인이라고 반성했을까.

2018년 새해에는 진짜 우리 서로 '무시'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