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18.01.11. 21:32
평화는 역설적이다. 군사평론가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평화를 얻기 위해선 반대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비에 옷이 젖지 않으려면 미리 우산을 준비해야 하듯이 말이다.
전쟁을 막기 위한 대화는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평화로 위장된 대화는 전쟁만큼이나 위험하다. 1938년 히틀러를 만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성취했다”고 장담했다.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마치 전쟁이 사라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독일은 그 사이 몰래 군사력을 키웠고, 회담 1년 후 세계대전이 터졌다. “유화주의자는 자신은 잡아먹히지 않으리라 믿으며 악어를 키우는 사람”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경고대로 수천만명이 악어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2년 만의 남북대화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체임벌린의 오류’가 재연될 위험이 있다.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은 히틀러 못지않은 독재자다. 그의 도발 의지는 한 번도 꺾인 적이 없다. 북한에 우호적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마저 “북한은 풀을 뜯어 먹더라도 핵 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북한은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에만 11번의 미사일 도발과 6차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이번 남북대화에서도 “북핵 거론하면 회담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미국 백악관의 기류도 여간 심상치 않다. 최근 우리 군 인사에게 밝힌 미국 안보담당자의 발언은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미국이 보는 일본과 한국 비중은 예전엔 6대 4였죠. 지금은 아마 9대 1쯤 되지 않을까요.” 그는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기 위해선 ‘한·미동맹 부담’과 ‘국제사회 용인’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해소돼야 한다고 했다. 전자는 이미 충족됐고 후자는 충족 과정에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최악의 경우 한·미동맹이 깨지더라도 별로 상관 안 해요. 한국이 빠지면 일본과 대만으로 태평양 방어선을 물리는 대안이 있으니까요.”
그간 미국이 대북 군사 카드를 꺼내지 않은 것은 우방국인 한국의 피해를 의식한 조치였다. 지금은 자국의 안전이 다급한 처지다. 한국이 겪는 전란보다 자국 국민의 생명이 더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는 얘기다. 앞으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면 미국 공격을 위한 거리상의 장애는 사라진다. 본토의 턱 밑에 핵을 배치하려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와 유사한 양상이 된다. 당시 제3차 세계대전까지 감수하면서 핵미사일 저지에 나섰던 미국을 떠올린다면 북핵에 대한 미국의 선택은 자명해진다.
이런 안보위기 상황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중국은 북한 급변 사태에 대비해 북·중 접경지에 북한 난민수용소 건설을 계획 중이다. 미국의 괌과 하와이, 일본 후쿠오카에선 북한의 핵 공격 대피 훈련을 실시했다. 정작 북한과 총부리를 맞댄 우리만 강 건너 불이다.
배연국 논설실장 |
올빼미는 하늘이 맑을 때 미리 뽕나무 뿌리를 주워 자신의 둥지를 칭칭 감아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상토주무(桑土綢繆)’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평소에 철저히 준비해야 훗날 근심을 덜 수 있다.
지도자는 모두가 잠자고 있을 때 홀로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모든 이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시기에 처칠처럼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지도자가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처칠보다 체임벌린이나 김성일 부류의 정치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역사는 반복된다. 적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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