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가 『게르하르트 슈뢰더 자서전 』한국어판 출판에 맞춰 방한한 게 지난해 9월이었다. 당시 3일간 사진취재를 하고 그 뒷이야기를 중앙일보 온라인에 게재했다. http://blog.joins.com/shotgun00/15205337
그 후 출판사의 요청으로 뒷이야기를 엮은 조그만 사진집(3일의 동행, 두 번의 눈물)을 만든 적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그날 함께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 넷이었다. 총리의 자서전을 출간한 ‘메디치 미디어’의 대표, 자서전을 편집한 편집자, 뒷이야기 사진집을 만든 북디자이너, 그리고 나였다.
넷 다 이러한 자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독일 총리를 지낸 사람이 난데없이 식사 초대를 하리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긴장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총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여러분을 친구로서 초대한 겁니다. 이렇게나마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맛있는 거 다 드십시오.”
총리의 옆자리에는 최근 연인으로 알려진 김소연 대표가 있었다. 김 대표는 현재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연방주 경제개발공사 한국대표부 대표를 맡고 있다.
그 기사 때문에 둘의 관계가 알려졌다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연방 총리 퇴임식에 『마이 웨이(My Way)』한 곡을 선정했습니다. 정치 입문부터 총리를 마칠 때까지 'My Way'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 내게 딱 맞는 노래입니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한국에서 남은 인생의 반을 살아야겠다고 하니 남들이 미쳤다고 합디다. 하지만 이것도 'My Way'라면 가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노래입니다.”
운명이라면 당신의 길을 가겠다고 총리가 고백한 것이다. 총리의 말에 적잖이 놀라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보며 정중히 부탁했다. “한국을 배경으로 둘 만의 사진을 찍어주시오. 그리고 사진집은 두 권이면 좋겠습니다. 한 권은 김소연의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해서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때였다. “이만하면 ‘한국의 사위’가 될 자격이 있지 않나요?” 총리가 농담처럼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공감하며 동시에 손뼉을 쳤다. 그 박수 바람에 둘의 사진을 찍는 게 결정되어 버렸다.
공식적으로 아직 둘의 관계를 발표하지 않은 터였다. 그러니 곤란한 상황이었다.
항상 3명의 수행원이 총리를 따르고 있었다. 수행원들에게 관광객이 촬영을 못 하게끔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수행원들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사진 찍는 것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의 답에 적잖이 놀랐다.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들의 국민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총리를 지낸 사람이라도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총리가 알아서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관광객의 시선을 피해 부용정 뒤로 몸을 숨길 뿐이었다.
그리고 둘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관광객들이 떠나기만을…. 족히 10여분 이상 그렇게 기다렸다.
김 대표의 제안이니 총리가 마지못해 외투를 벗었다. 그런데 기온이 영하 7도가 아니던가? 더구나 부용정 뒤에서 떨다가 나온 직후였다. 먼저 외투를 벗은 총리가 김 대표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총리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3일의 동행, 두 번의 눈물
권혁재 중앙일보 2017.09.17. 08:303일간, 한 사람의 사진취재, 20여년 이상 사진기자를 해왔지만 처음 받아본 취재의뢰였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알 듯했다. 3일의 동행에서 그의 이야기를 찾으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9월 9일 토요일 오후 4시,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와 대담이 첫 만남이었다.
김 대기자가 첫 질문을 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집’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떤 이유인가?”
“사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과거 범죄행위 참여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범죄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후세대가 통감하고 책임질 필요가 있다. 독일에선 독일이 과거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후세대가 반복하지 않도록 기억시키고 배우고자 한다. 후세대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역사적으로 책임을 같이 져야 한다.”
그의 답에 적잖이 놀랐다. ‘나눔의집’ 방문은 11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안네 프랑크의 사진 액자와 기부금 1000만원을 전달할 것이란 사실이 보도자료로 이미 알려져 있었다. 사실 처음 그 보도자료를 봤을 때,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겠거니 했다. 이번 한국 방문이 그의 한국어판 자서전 발간과 맞물려 있기에 그리 지레짐작했다.
그런 터니 그의 말을 듣고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눔의집 ’방문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당신의 소신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이런 제스처를 하는 것에 있어서 하등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외교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현직 총리가 아니지만, 설령 현직 총리라 해도 이것은 객관적 사실과 역사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관심표명이라는 측면에서 외교적 관례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 사실과 역사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관심표명'이 외교적 관례를 앞선다는 것, 바로 그의 소신이었다.
9월 11일 오후 3시,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도착했다. 그가 고인이 된 김학순 할머니의 흉상 앞에 섰다. 김 할머니가 1991년 위안부 피해를 공개적으로 처음 알린 분이라는 소개에 이내 표정이 숙연해졌다. 그리고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몇 발 다가와 '나눔의집' 소녀상 앞에 섰다. 한참을 마주 보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위안부는 잘못된 표현이라 생각한다. 위안이라는 말엔 자발적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은 전쟁의 참혹함에 희생된 분들이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란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
평소 그렇게 생각해왔다고 했다. 그는 이들 위안부 피해자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충분히 자격이 있고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말했다. “먼 길 오셔서 너무나 감사 드립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독일이 사죄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울었습니다. 행복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릴 찾아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그는 머리 숙여 답례를 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마음으로는 기자회견을 할 수 없다. 할머니들과 고통을 나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아프다. 때론 기자회견이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있는데 지금 여기가 바로 그런 것 같다.”
숙연하고 정중했다. 사실 그가 보여준 행동과 들려준 말만으로도 딱히 기자회견은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 많은 기자들 중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기 꼭 소개를 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빠진 것 같다. 그는 김사복씨의 아들 김승필씨다.”
김승필씨가 일어나 인사를 했다.
바로 그의 옆자리였다.
“총리께서 사진을 안 찍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네요.”
뭔 일인가하고 놀라서 물었다. “왜요?”
“하도 많이 우셔서 눈이 새빨개졌다고 하시네요.”
뒤따라 나오는 그의 눈을 봤다. 진짜 그랬다. 카메라를 들고 눈을 가리키며 찍는 시늉을 했다. 종일 붙어 다닌 터라 장난스럽게 시늉을 한 게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얼굴까지 빨개졌다.
그때 나도 모르게 카메라가 셧터를 눌러버렸다. 엉겹결이었다. 미리 부탁까지 한 상황에 셧터를 눌렀으니 큰 결례가 아닐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였다.
부탁을 듣자마자 그가 수행원들을 헤치고 나왔다. 마침 김승필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황식 전 총리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 1시간 가량 여유가 있었다.
shotgun@joongang.co.kr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人文,社會科學 > 時事·常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쓸신세] 일본은 왜 '고양이 천국'이 되었을까 (0) | 2018.01.21 |
---|---|
[현장메모] 외모가 기준?.. 北 미녀응원단이 불편한 이유 (0) | 2018.01.20 |
[윤희영의 News English] 겸손으로 가장한 자기 자랑 (0) | 2018.01.18 |
[행복피로사회] [1-1] 행복하려 애쓰는 당신… 피곤하지 않나요? (0) | 2018.01.17 |
800년 전 베트남 '리 왕조'서 한국 '화산 이씨' 나온 사연 (0) | 2018.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