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1.24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1994년 8월 23일. 충남대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 관계자들은 대전 월평동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갑천변 야산 위에 모였다.
4년 전 이곳에서 정수장 확장공사를 하다 유적이 훼손됐고 때마침 주변을 지나던 시민이 그 장면을 목격, 신고함에 따라
발굴로 이어진 것이다.
9월 12일. 김길식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는 좁고 깊은 도랑을 파다가 고운 진흙에 뒤덮인 목제 구조물 일부를 발견했다.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니 네모난 구덩이 속에 상수리나무로 만든 정방형 구조물이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한 변의 길이가 5.2m, 잔존 높이가 1.7m나 됐다. 이 구조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던 중, 그 소식이 외부로 전해졌고
급기야 한 신문에 '대전에서 낙랑 목곽묘 발굴'이라 보도되기도 했다.
현악기 양이두, 대전 월평동 유적, 길이(상하) 9.2㎝, 국립공주박물관.
김 학예사는 진흙이 품고 있던 다양한 유기물을 수습하며 한 달가량 노출을 계속했고 이 구조물이 무덤이 아닌
지하 창고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바닥에는 사다리를 비롯해 각목 다발, 말안장, 그릇, 주걱 등 다양한 목제품과 함께
작은 나뭇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유물 가운데 일부는 보존처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용희 학예사는 그중 8개의 구멍과 어딘가에 끼울 수 있는 홈을 갖춘 나뭇 조각이 악기임을 직감했다.
자료를 찾던 그는 비록 12현을 갖춘 것이지만 일본 정창원 소장 신라금(新羅琴)의 머리, 즉 양이두(羊耳頭)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 전율했다. 백제 현악기 실물이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유적 훼손 현장을 신고하지 않았다면, 목곽고 바닥 판재를 수습하지 않았다면, 나무 조각이 악기의 일부임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월평동 현악기는 우연과 필연을 넘나들며 지금 우리와 조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월평동 유적은 백제의 최전방에 위치한 산성이다.
전장(戰場)과 현악기는 어색한 조합 같지만 전장에서 악기와 그것이 빚어내는 선율은 불가결한 요소다.
이 악기도 백제 군사들이 지녔을 두려움과 그리움을 덜어주던 '전선야곡' 연주에 쓰인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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