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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훈의 글로벌 리더십 읽기] 정의가 환하게 빛날 때까지/57년 만에..'임실치즈의 아버지'진짜 한 국인 됐다

바람아님 2018. 1. 28. 08:48

[남상훈의 글로벌 리더십 읽기] 정의가 환하게 빛날 때까지

서울신문 2018.01.27. 03:36



남상훈 캐나다 빅토리아대 경영대 교수

진정한 한국인 디디에 세스벤테스. 1931년 벨기에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다. 어릴 적 꿈은 우편배달부. 자전거를 실컷 타고 싶어서다.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루뱅대 철학과에 들어간다. 한국인 유학생 둘을 만난다. 한국으로 오라고 권유한다. 그중 한 사람은 우리나라 국회의장이 된다. 내심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은 아프리카의 벨기에령 콩고. 당시 한국은 콩고보다 더 위험한 나라다. 좁은 문을 택한다.


1958년 한국에 온다. 첫 부임지는 부안. 거기서 한국 이름을 얻는다. 지정환. 언어는 물론 식사도 힘들다. 매일 청국장과 김치와 밥. 냄새 때문에 먹지 못해 여러 날 굶는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먹는 수밖에 없다. 억지로 몇 번 먹으니 ‘구수하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습도가 높은 장마철은 지옥. 복통과 설사가 심해진다. 탈진되어 병원에 가면 링거주사 한 대를 놔주고 약이라고 주는 것은 인삼차뿐. 인삼이 맞지 않는 체질이라 오히려 증세는 더 나빠진다. 담낭 제거 수술을 받는다. 스스로 ‘쓸개 없는 놈’이라고 부른다.


가난한 주민들은 외국에서 구호물자로 온 밀가루 배급으로 살아간다. 어떻게 가난의 굴레를 끊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 마침 정부에서 간척지를 개간하면 1인당 3000평의 땅을 준다고 한다. 쉬지 않고 노력해 여의도의 두 배가 넘는 땅을 개간한다. 주민들에게 나누어 준 후 건강 회복차 벨기에로 갔다가 6개월 후 돌아온다. 그사이 주민들은 고리대 노름으로 자신의 땅을 다 팔고 떠난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도와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깊은 배신감. 이제는 다시 한국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임실로 발령이 난다. 경치는 아름답지만 몹시 척박한 땅. 자신들을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주민들은 환경을 탓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조차 않는다. 겨울로 접어들면 농작물을 팔아 마련한 돈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한다. 군수가 간곡하게 부탁한다. “떠나실 때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임실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은 꼭 남겨 주셨으면 합니다.” 다시는 개입하지 않는다 다짐했던 마음이 흔들린다.


주민들을 다독여 신용조합을 만들고 산양을 키운다. 생산된 산양유가 병원과 환자들에게 팔고도 남는다. 무엇을 할까. 치즈를 만들어 보자. 전문지식이 없이 의욕만 앞선 시도. 3년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다. 유럽에 가서 3개월간 치즈 만드는 법을 배우고 돌아온다. 그사이 조합원 11명 중 10명이 떠난다. 실망스럽지만 포기는 없다. 하나 남은 조합원과 치즈를 만든다.


실패와 성공이 거듭된다. 치즈 판매에 나선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문을 두드린다. 외국인 전용상가 및 조선호텔 납품에 성공한다. 미군부대에서 불법으로 흘러나온 치즈가 전부였던 시절. 한국 최초로 만들어진 임실치즈는 서울의 특급호텔까지 유통망을 넓히며 성장한다. 누가 임실이 ‘한국 치즈의 본고장’으로 떠오를 줄 알았을까. 나라의 민주화에도 참여한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 반대하다 경찰에 잡혀간다. 강제 추방의 위기를 맞는다. 마침 농촌 발전에 관심이 많던 박정희 대통령이 ‘임실치즈로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신부’라는 것을 알고 추방 명령을 거둔다. 경찰들을 만나면 지정환이란 자신의 이름은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의미라고 일갈한다.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다. 벨기에로 가서 치료를 받고 돌아온 후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한다. 2002년 호암상을 받는다. 상금 1억원에 사재를 보태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한다. 2007년부터 매년 장애인 학생 20~30명이 혜택을 받는다. 2016년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한다. 한국에 온 지 어언 53년. 법적으로 한국인이 된다. 남은 생애 봉사의 여정을 다 마친 후 한국 땅에 뼈를 묻으리라.


누구를 ‘위해’ 살기보다 ‘함께’ 살았다는 정환. 그는 자신을 굴삭기에 비유한다. “세상에는 버릴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내 높이로 올려놓고, 그다음엔 더 밑에 있는 사람을 다시 그 높이로 올려놓고, 그러다 보면 세상이 달라지겠지요.” 국경을 넘어서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푸른 눈의 이방인. 그야말로 진정한 한국인이자 글로벌 리더다.



57년 만에..'임실치즈의 아버지'진짜 한 국인 됐다

중앙일보 2016.02.05. 01:25


지정환 신부, 법무부 국적증서 받아지역경제, 장애인 복지 기여한 공로2002년엔 호암상 사회봉사상 수상"좋은 설 선물..한국과 영원히 할 것"
지정환 신부는 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됐다. [사진 명인문화사]
전북 완주군 소양면의 자택 ‘별 아래’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는 지정환 신부. [사진 명인문화사]

‘임실치즈의 아버지’로 통하는 지정환(85·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가 4일 법무부로부터 국적 증서를 받으면서 법적으로 진짜 한국인이 됐다. 한국에 온 지 57년 만이다.


지 신부는 벨기에 귀족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한국행 배에 올라 첫 부임지인 전북 부안의 부안성당에 도착했다. 주임신부인 그는 부안군청의 간척사업 허가를 받아 축구장 140개 규모의 간척지(약 100만㎡)를 일궜다. 이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67년 두 번째 부임지인 전북 임실에선 농민들의 자활 기반 마련을 위해 치즈 공장을 세웠다. 2년 넘게 실패를 거듭한 뒤 이탈리아 견학까지 다녀온 끝에 69년 한국 최초로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농민들이 정성껏 만든 임실치즈는 서울의 특급호텔로 유통망을 넓히며 승승장구했다. 72년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국내 최초로 들어선 피자 가게에 모차렐라 치즈를 공급하기도 했다.

현재 임실치즈가 지역 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 개, 임실치즈를 음식에 쓰는 브랜드만 70여 개다.


지 신부는 70년대 유신체제 저항 운동에 앞장섰다가 강제 추방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임실치즈를 만든 외국인 신부”라는 보고를 듣고 추방 명령을 거뒀다고 알려진다.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에게 나눠 줄 우유를 트럭에 싣고 혼자 광주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는 70년대 초반부터 휠체어 신세를 졌다. 오른쪽 다리의 신체 기능이 조금씩 마비되는 병(다발성신경경화증)을 앓아서였다. 병 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84년 귀국해 중증 장애인의 뒷바라지에 헌신하고 있다. 전북 완주군에 장애인 재활센터 


‘무지개 가족’을 설립하고 중증 환자들의 욕창 치료와 운동 재활에 힘썼다.

2002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으로 받은 상금 1억원과 사재를 털어서 ‘무지개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2007년부터 매년 장애인 학생 20~3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지금은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 ‘별 아래’라는 집에서 장애인·봉사자들과 같이 산다.

이날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천노엘(84·오네일 패트릭 노엘) 신부도 지 신부와 함께 한국 국적을 갖게 됐다. 아일랜드인인 천 신부는 지적 장애인·봉사자가 함께 생활하는 소규모 가족형 거주시설 ‘그룹홈’을 30여 년 간 운영해 왔다. 국적법은 2012년부터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게 특별귀화를 허가하고 있다.


이 규정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은 인요한(57)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등 7명이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지역 경제 발전과 장애인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해오신 지 신부님과 천 신부님께 국민을 대표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지 신부는 본지와 e메일 인터뷰에서 “나를 한국사람으로 생각해줘서 고맙다. 내게는 정말 좋은 설 선물”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또 “첫 부임지인 부안은 첫 사랑이고 두 번째 부임지인 임실은 내 고향이다. 신랑·신부가 결혼하면서 영원히 함께 하자고 약속하듯 나 또한 한국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설을 맞아 장애인 및 소외계층에겐 “지금 할 수 없는 것, 없어진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길 바란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서 세상으로 더 밝게 뻗어 나가길 바란다”고 했다.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57년만에 한국인 된 '임실치즈 아버지' 지정환 신부

장혁진 중앙일보 2016.02.04. 18:01
부암본당 주임신부 시절. [명인문화사 제공]
57년만에 한국인 된 `임실치즈 아버지` 지정환 신부
특급호텔로 임실치즈를 납품하고 치즈를 확인받는 모습. [명인문화사 제공]
지학순 주교 구속 및 인혁당 사건과 관련한 투쟁 중 체포되는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장애인 복지사목에 힘쓴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미사를 집전하는 지정환 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호암상 시상식에서. [명인문화사 제공]
사제 50주년을 맞은 지정환신부. [명인문화사 제공]
4일 열린 국적증서 수여식. 왼쪽부터 신혜경 원장 수녀, 김현웅 법무부장관, 천노엘 신부. [법무부 제공]
지난 2일 완주의 ‘별아래’에서 지정환 신부. [법무부 제공]

푸른 눈의 신부는 김치의 나라에서 치즈로 기적을 일으켰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 격인 지정환(85·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 얘기다. 지 신부가 4일 법무부로부터 국적 증서를 받으면서 법적으로 진짜 한국인이 됐다. 한국에 온지 57년 만이다.
지 신부는 벨기에 귀족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이듬해 한국행 배에 올랐다. “전쟁의 땅이 희망을 품게 하자”는 이유였다. 첫 부임지인 전북 부안에서 그는 바닷물을 막아 여의도보다 두 배 넓은 간척지를 만들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지로 나눠줬지만 고리대ㆍ노름으로 그 땅들이 다 넘어가는 걸 보며 상처를 받았다. "다시는 한국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지 신부는 다짐했다.

하지만 목자(牧者)의 선한 오지랖이 어디 가겠는가. 64년 두번째 부임지인 전북 임실에서 가난이 일상인 농민들을 만났다. 임실이 가진 자산은 초록의 들판 뿐이었다. ”이번엔 아주 조금만 개입하자“는 마음으로 산양 두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산양유를 치즈로 만들어 농민들의 자활 기반을 마련하자는 생각이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오기가 생겼다.

벨기에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치즈공장까지 지었다. 말만 공장이지 흙벽돌을 쌓고 땅굴을 발효실로 만든 허름한 시설이었다. 약탕기와 막걸리 누룩까지 동원했지만 3년 넘게 실패만 했다. 이탈리아까지 견학을 다녀온 끝에 69년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만든 최초의 치즈였다.

미군부대에서 불법유통되는 치즈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농민들이 정성껏 만든 임실치즈는 서울의 특급호텔까지 유통망을 넓히며 승승장구했다. 72년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 국내 최초로 생긴 피자 가게에 공급된 모짜렐라 치즈도 지 신부의 작품이었다. 공장 규모도 커지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임실치즈가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개,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개다. 임실이 ‘한국 치즈의 본고장‘으로 떠오른 배경이다.지 신부는 시대의 불의에 맞서 목소리도 열심히 냈다. 70년대 다른 외국 선교사들과 함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에 동참해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 돼 강제 추방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농촌 발전에 관심이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임실 치즈로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신부”라는 보고를 듣고 추방 명령을 거뒀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들에게 나눠 줄 우유를 트럭에 싣고 혼자 광주로 내려갔다. 당시 경찰들을 만나면 '지정환'이란 자신의 이름이 "정의가 환히 빛날 때까지 지랄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던 그였다.

앞만 보고 너무 열심히 뛰었던 탓일까. 지 신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오른쪽 다리에 다발성신경경화증을 앓기 시작했다. 신체 기능이 조금씩 마비되는 병이었다. 그때부터 지 신부는 목발과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3년 간 병치료를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84년 귀국한 뒤 중증 장애인의 뒷바라지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같은 장애인으로서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임실치즈공장은 주민 협동조합으로 변경한 뒤 운영권·소유권을 조합에 전부 넘겼다.

84년 지 신부는 전북 완주군에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 ‘무지개 가족’을 설립했다. 그는 이곳에서 누워지내야만 하는 중증 환자들의 욕창 치료와 운동 재활에 힘썼다. 이곳을 거쳐 현재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장애인만 수백 여명에 이른다. 그가 집전하는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이뤄진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지병이 있든 없든 미사 도중엔 누구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들이 창피함을 느끼는 걸 배려한 것이다.

20여년에 걸쳐 중증 장애인을 치유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 신부는 2002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지 신부는 이때 받은 상금 1억원과 사재를 털어 장애인을 위한 ‘무지개장학재단’을 세웠다. 2007년부터 매년 장애인 학생 20~3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지금은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별아래’라는 집을 지어 무지개가족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4일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천노엘(83·오네일 패트릭 노엘) 신부도 지 신부와 함께 국적 증서를 받았다. 아일랜드인인 천 신부는 81년부터 지적 장애인·봉사자가 함께 생활하는 소규모 가족형 거주시설인 ‘그룹홈’을 운영해 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국적법은 2012년부터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 대해 특별귀화를 허가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인요한(57)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2012년 3월 처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번 특별귀화로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이 된 외국인은 7명이 됐다.

김현웅 법무부장관은 “지역 경제 발전과 장애인을 위한 두 분의 헌신적 활동에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사랑과 나눔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 더욱 따뜻한 사회가 되도록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지정환 신부는 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지 신부가 최근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탓에 신혜경(58) 원장 수녀가 경기도 과천으로 올라 와 증서를 대리 수상했다. 본지는 국적 증서 수여식 며칠 전부터 지 신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언론에) 마치 내가 영웅처럼 다뤄지는 게 싫다"는 거였다. e메일로만 답변을 받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에 그 원문을 싣는다.


Q : 57년 만에 법적으로 한국 사람이 되셨습니다.
A : “법무부에서 특별한 배려로 저를 특별공로자로 인정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주신다니 기쁩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저를 한국사람으로 인정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정말 좋은 선물입니다.”

Q : 신부님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의미인가요.
A : ”벨기에에서 외방선교 신학교(선교목적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한국은 저의 고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부임지인 부안은 제겐 첫사랑같고 두 번째 부임지인 임실은 제게는 고향입니다. 임실에 부임했을 때 “천주교 신자 뿐만아니라 임실 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은 꼭 남겨달라는 임실군수(문필병)의 한마디가 지금의 임실치즈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제게 고향이자 가족이 있는 곳입니다. 신랑ㆍ신부가 결혼하면서 영원히 함께 하자고 약속하듯 저 또한 한국과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합니다.“


Q : 이제 임실치즈와 관련된 일은 안하시나요.
A : ”저는 그저 성직자일 뿐입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들(후임자)이 편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임실치즈축제를 다녀왔는데 축제기간 중 10만명 이상이 방문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시간낭비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Q : 최근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들었습니다.
A : ”지난해 1월 17일경 집에서 갑자기 쓰러진 이후 말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이후 치과 치료, 백내장 수술등 병원을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치즈공장가족, 무지개가족, 장학재단가족 등 나에게는 수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모두 잘 시작했고, 결국은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또 행복한 사람입니다.”

Q : 곧 민족의 명절인 설입니다. 설을 맞아 장애인 및 소외계층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있으신지요.
A : ”지금 할 수 없는 것, 없어진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면서 세상으로 더 밝게 뻗어 나가길 희망합니다.“

Q : 앞으로 이 땅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으신지요.
A : ”요사이 무지개 가족에서 함께 생활했던 분들의 사망 소식을 자주 접합니다. 그럴 때마다 무지개 가족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셨던 분들이기에 ‘장애로부터 해방되어 천국으로 가시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슬프지만 기쁜소식이지요! 비온 뒤 청명한 하늘에 기다리면 나타나는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장애인들이 세상으로 더 밝게 뻗어 나가길 희망합니다. 저는 한국에 올 때 이미 한국과 영원히 함께 하길 마음속으로 약속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제 신부가 죽으면 모두 화장(火葬)을 합니다. 아마도 제가 죽게 되면 화장(火葬)하여 천주교 ’천호성지‘로 가겠지요!”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