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왕소군의 원망'에 나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오랑캐 땅에는 화초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은 아니네.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지는 것은. 허리를 날씬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라네> 이 시는 뇌물과 거짓 때문에 한 여인의 일생이 비참에 처하게 된 사연을 담고 있다.
한나라 황제였던 원제는 북방의 강국인 흉노의 군주가 왕실의 공주를 배우자로 삼겠다는 전갈을 받는다. 황제는 화공을 시켜 가장 못생긴 궁녀를 골라서 얼굴을 그린 뒤 공주라고 속여 보내도록 한다. 궁녀를 공주로 속여 흉노에 시집보내는 날, 궁녀의 실물을 본 황제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절세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화공이 평소 뇌물을 준 궁녀들은 실물보다 예쁘게 그려주었다는 것과 그 궁녀는 한 번도 뇌물을 주지 않아 일부러 못나게 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공은 곧 목이 잘렸다. 화공이 궁녀들에게 뇌물을 받은 것도 죄지만 황제를 속인 것이 더 큰 죄였다. 억울하게 오랑캐 나라 흉노로 끌려간 궁녀의 이름이 왕소군이다. 그녀는 억울함과 향수병이 겹쳐 허리띠가 느슨해질 만큼 야위어갔다. 그녀에게는 봄이 왔어도 봄이 아니었다.
궁녀 왕소군의 '춘래불사춘'은 사람들 사이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문화 모든 분야에도 있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 않은 날씨처럼 어수선하고 진흙탕 같은 형국이 비슷하다.
청와대가 주도하고 있는 개헌만해도 그렇다. 20일 청와대가 개헌안 내용과 일정을 공개하자 여야가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과 현 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이 있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추진되다보니 민감하다. 여당은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야당은 부정적이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표결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제명할 것"이라며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야당은 개헌이라는 속임수에 당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운 것이다. 개헌을 둘러싼 청와대와 여야의 치열한 공방은 거친 봄 날씨 만큼이나 살벌하다.
미투 운동으로 실체가 드러난 주류사회 성공한 남성 가해자들 역시 이번 봄은 춥다 못해 엄동설한과 같다. 5년 혹은 10년 전 전성기 때 자신의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해 사회적 약자인 젊은 여성들을 성추행하거나 성 폭력을 가한 것 때문에 비애감과 고통에 빠져있다. 이들 역시 자신이 가진 지위를 이용해 온갖 달콤한 거짓말로 성적 추행과 폭행을 한 죄다.
봄은 봄인데 봄 같지 않은 날씨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가 예민하고 어수선하다. 궁녀 왕소군은 자신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것과 화공이 황제에게 거짓말한 것 때문에 평생을 '춘래불사춘'의 원망 속에 외롭게 살아야 했다.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국사회 거대 이슈들이 '춘래불사춘'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은 아닐지 두렵다.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들이 다가오고 있는 봄의 온기에 순순히 물러나는 꽃샘추위였으면 좋겠다.
[CBS노컷뉴스 조중의 논설위원] jijo@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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