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3.22 남정욱 작가)
['아미스타드']
19세기 노예船 흑인 반란 다룬 스필버그 감독의 1997년 영화
南北전쟁으로 노예 폐지 후에도 투표권 빼앗는 등 차별 계속
1960년대 흑인 民權 운동 이후 비로소 '정치적 차별'도 사라져
남정욱 작가
노예와 관련해서 가장 클래식한 어록을 남긴 사람은 독일 철학자 G.W. 헤겔이다.
그는 "최초의 노예는 정복자가 관용을 베풀어 목숨을 살려준 전쟁 포로"였다고 주장했다.
헤겔보다 훨씬 전에 노예 제도에 기반을 둔 최초의 사회였던 그리스의 철학자 두 명도 노예제도 옹호에
힘을 보탰다. 플라톤은 그리스인이 외국인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반대로 그리스인이 노예가 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발 더 나가 "열등한 품종의 인간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면서 '노예=동물'의 등식을 설파했다.
이 논리는 노예제가 인종차별의 뿌리임을 자백한다는 측면에서 무섭고 섬뜩하다.
이 발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노예제도 옹호자들에게 불려 나와 다채롭게 활용된다.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아메리칸인디언을 노예로 부렸다.
그러나 목욕에 인색했던 유럽인은 세균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이들이 뿌려댄 감기, 천연두, 홍역은 가공할 살상력으로
면역력이 없던 인디언을 초토화시켰다. 이들을 대체한 것이 아프리카 흑인이다.
콜럼버스는 '사납지만 건장하고 이해력이 좋아 잔인성만 제거하면 최상의 노예가 될 것'이라며 흑인 한 명이
아메리칸인디언 네 명 몫을 한다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결국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라는 세 개의 대륙이
삼각무역이라는 형태로 엮이는 대서양 흑인 노예 무역시대가 열리게 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1619년 8월 아프리카 흑인 20명이 영국의 버지니아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에 '상품'으로 '하역'된다.
앞으로 미국이라 불릴 나라에 흑인이 처음 상륙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아시다시피 참혹한 흑인 노예 수난사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7년 작품 '아미스타드'는 1839년 에스파냐 노예 선박에서 일어난 흑인 반란을 다룬 영화다.
거사(擧事)에는 성공했지만 이들이 대형선박을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바다 위를 떠돌다가 미국 해군 함대에 붙잡히고 선원들을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
재판은 노예 폐지론자와 옹호자들의 대결로 확대되고 변호인으로 나선 전직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만일 남부가 옳다면 독립선언문은 다 사기고 개소리!"라는 일갈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논리와 감성이 아닌 전쟁의 형태로 승자를 가려야만 했다.
한쪽은 900만명 인구 중 350만이 노예(남부)였고, 다른 한쪽은 2200만명 중 30만이 노예(북부)였던 1861년의 남북전쟁이다.
전쟁 직전 발표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여론을 주도했다.
스토는 사흘간 켄터키주를 여행한 것 말고는 노예제도를 본 적도 없는 작가였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북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부의 여러 주는 흑인 차별 법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투표권부터 빼앗았다.
흑인이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다. 그것도 헌법 시험. 읽고 해석해야 했다.
가끔은 문제가 라틴어로 출제되기도 했다. 백인도 시험을 봤다.
백인에게 주어진 문제는 이런 것들이었다. 'dog를 읽어보시오.'
이런 집요한 노력의 결과로 1896년 95%를 넘었던 루이지애나의 흑인 투표율은 1904년 1.1%로 떨어진다.
차별이 가장 심했던 미시시피는 0%를 기록한다.
흑인 민권 운동은 1961년 '프리 라이더스'라고 불린 흑·백인 버스 같이 타기 운동으로 제대로 타오른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운동이었다. 백인들의 증오심은 대단했다.
운동의 열기도 타올랐고 KKK단이 던진 화염병에 맞아 흑·백 대학생들이 타고 있던 버스도 타올랐다.
수많은 인권운동가와 케네디의 목숨을 거둬간 끝에 1966년 흑인이 상원의원에 임명되고
다음 해 흑인 대법원 판사가 탄생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노예제는 '정치적'으로 폐지된다.
역사적으로 등장했던 모든 노예는 거의, 항상,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노예 제도는 좀, 많이 특별하다.
노예 문제를 연구하던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명예교수는 미국 학자들과 토론을 하다가 우리의 조선 시대에도
노예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미국 학자들은 그 노예를 어디서 데려왔느냐고 물었고 이영훈 교수는 동족 가운데서 만들었다고 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그들은 그저 말없이 입만 벌리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렇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아 유 어 휴먼?(당신들이 인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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