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13억 중 1人의 용기

바람아님 2018. 3. 28. 06:49

(조선일보 2018.03.28 김기철 논설위원)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 출신 후스(胡適)가 1917년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개인의 자유와 여성해방을 내건 도발적인 글로 충격을 던졌다.

당시 젊은이들은 후스를 하느님으로 떠받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열광했다.

후스는 장제스 정부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한편, 공산당이 자유의 적(敵)임을 꿰뚫어봤다.

'계급 독재를 주장하는 당신들은 자유를 신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집권하자마자 후스를 반동(反動) 수괴로 지목하고 비판 운동을 펼쳤다.


▶후스를 베이징대로 끌어들인 게 차이위안페이(蔡元培)다.

독일 라이프치히대에서 칸트 미학(美學)을 공부한 그는 1917년부터 10년간 베이징대 총장을 지내며 대학 자유 수호에 힘썼다.

학생들이 비판 의식을 갖도록 이끌어 5·4운동의 산파역을 했다. 차이위안페이는 장제스 독재 저항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진취(進取)가 지나치면 악화(惡化)가 되고, 보수가 지나치면 부패한다.' 그는 좌우 모두에 거리를 둔 행동으로 존경받았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베이징대학은 2007년 신설한 자유전공학부에 '위안페이대학(元培學院)'이란 이름을 붙였다.

엊그제 이 학부 리천젠(李沈簡) 상무부원장이 시진핑 장기집권에 반대해 사표를 냈다고 홍콩 언론이 보도했다.

리 부원장은 소셜미디어에 '포용과 사상의 자유는 베이징대의 정신적 횃불'이라며

'자유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기개 넘치는 지식인들의 처절한 희생의 대가'라고 썼다.

'차이위안페이가 기개 있는 지식인의 모델'이라고도 했다. 베이징대의 기개가 아직 안 죽었다는 감탄이 나왔다.


▶리 부원장은 미국 뉴욕대 교수로 있다가 인재 초빙에 응해 귀국한 '하이구이'(海歸·귀국유학생)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하는 반응도 나온다. 하지만 '시(習)황제' 아래서 반대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다.

당초 리 부원장과 함께 사직한 것으로 알려진 원장·부원장은 아직 집무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반(反)우파 운동과 문화혁명, 톈안먼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용기 있는 지식인은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정치적 살인에 희생된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처럼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 작가, 사회운동가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식인을 일컬어 '빛을 밝혀주고 시대를 명료하게 해석하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라고 했다.

리천젠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