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5.02 이하원 논설위원)
1992년 5월 북한이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핵 시설 현황과 플루토늄 보유량을 신고했다.
남북 비핵화 공동 선언,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으로 유화적 분위기가 형성된 직후였다.
북은 5MW 원자로와 건설 중인 2기의 대형 원자로 등을 신고서에 써 냈다.
재처리를 한 것은 단 한 차례로 80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그간 수집해온 북한의 핵 개발 관련 위성사진들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북한이 고체 폐기물 저장소를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숲으로 위장했으며, 액체 폐기물 저장소는
흙으로 덮은 후 다른 건물을 지어 지하로 은폐한 사실을 드러냈다.
북한이 신고한 폐기물 저장소는 IAEA의 눈을 속이기 위해 급조한 가짜 시설이었다.
IAEA는 샘플을 정밀 분석한 결과 북한이 최소 세 차례에 걸쳐 10~12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사실을 확인했다.
북한 신고 내용보다 100배 이상 많은 양이었다.
북핵 위기는 이처럼 북한의 거짓 신고가 드러나면서 불거졌다.
▶2007년 북핵 6자회담의 2·13 합의에 따라 북은 '냉각탑 폭파 쇼'를 벌였고 미국은 그 대가로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했다. 다음은 북이 IAEA의 검증을 받을 차례였다. 북은 검증 방법을 '문건 확인, 현장 방문, 기술자 인터뷰'의 세 가지로
한정한다고 못 박았다. 핵물질 시료 채취 허용은 거부했다. 자신들이 신고한 내용을 그대로 믿으라는 말이었다.
▶북한은 당시 플루토늄 추출량을 38.5kg으로 신고하면서 그중 26kg을 핵무기 제조에 사용했다고 했다.
당시 국제사회가 추정하고 있던 추출량보다 14~20kg 적은 양이었다.
핵무기 2~3개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을 빼놓은 것이다.
▶얼마 전 IAEA 사무총장은 미·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합의가 이뤄질 경우 "북핵 시설을 사찰하는 데 준비 기간은
몇 주면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핵 관련 시설을 그동안 꾸준히 추적 감시해 왔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제 핵무기 30~40개 분량의 핵물질을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핵폭탄 하나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6㎏은 오렌지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앞서 두 차례나 핵 신고를 거짓으로 했던 북이 이번에는 성실 신고를 한다는 보장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핵 담판이 성공적으로 타결된다고 해도 진짜 비핵화 줄다리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북한과의 합의문에는 의심스러운 경우 '언제든 어디든' 특별 사찰할 수 있다는 문구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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