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8-04-17 03:00
동전을 만들고 있는 사람.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 제공
“화폐를 위조하다가 적발된 자는 중범으로 처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득이 크다 보니 아무리 엄하게 금지하더라도 위조를 막기 어렵습니다. 화폐를 위조하다가 발각되면 직접 만든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공범으로 도와준 사람은 유배에 그치기 때문에 화폐를 위조하다 체포된 자는 모두 단순히 도와주기만 했다고 변명하여 죽음을 모면한다고 합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상평통보의 등장으로 화폐의 유통 범위는 상인이나 일부 부유층을 넘어 일반 백성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비용을 아끼려고 동전 제작을 민간에 맡기다 보니 화폐의 제작 기술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됐다. 구리로 동전을 위조하기 위해 놋그릇 절도가 횡행할 정도였다. 이처럼 국가의 명령을 어기고 불법으로 동전을 제조하는 위폐 제조자를 ‘도주자(盜鑄者)’라 했다.
화폐 위조는 조선 초부터 문제가 되었고 동전 사용이 보편화된 17세기 말에 이르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숙종은 화폐 위조를 막기 위해 제작자는 물론이고 공범까지 무겁게 처벌했다.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위조화폐 제작업자들은 서울을 떠나 산속이나 도서지역으로 숨어들었다. 심지어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그 안에서 위폐를 제조했다. 영·정조 시대 역시 위조화폐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승정원일기에는 1724년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선갑도의 위조화폐 제작 현장을 급습한 기록이 있다. 단속 정보가 새어 나가 위폐 제조자는 대부분 놓쳤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구리 3000근, 납 2000근, 석탄 200섬을 압수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으로 짐작된다.
이옥이 남긴 ‘석굴도주’라는 글에도 위조화폐 제작 현장과 그 실상이 잘 드러난다. 경남 진주의 토포군(형사) 허남은 수상한 세 여인을 발견했다. 그들은 돈을 물 쓰듯 했다. 허남은 뒤를 밟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고성의 한 동굴이었다. 동굴 안에는 쇠를 녹이는 화로 십여 개가 있었다. 가짜 상평통보를 만드는 곳이었다. 위폐 제조업자들은 허남에게 뇌물을 주고 회유했다. 기업적으로 위폐를 주조하고 돈세탁을 하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이후 허남이 포교들을 이끌고 다시 현장을 급습했을 때는 이미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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