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이 갈라진 나무 활과 구부러진 나무막대를 가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약초를 캐다가 뱀을 만나면 큰 놈이건 작은 놈이건 나무 활로 머리를 누른다. 뱀이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리면 구부러진 나무막대로 조여서 뱀의 이를 다 뽑고 손으로 껍질을 벗겨 화살통에 보관한다. 밥이 다 되면 소금을 뿌려서 굽고 남김없이 먹는데, 오래 지나면 중독돼 죽는 자가 이어진다.”
―강희맹 ‘뱀 먹는 사람 이야기(啗蛇說)’
연산군은 뱀을 매일 한 상자씩 바치라고 했다. 어디에 쓰려고 했을까? 이 명령을 내린 날 몸이 불편해서 아침 조회에 늦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약에 쓰려고 그런 듯하다. 아무 뱀이나 약이 되는 건 아니었다. 백화사(白花蛇)라는 독사가 주로 쓰였다. 사유환(蛇油丸)은 백화사에서 짜낸 기름으로 만든 환약이다. 조선 왕실은 이 약을 조제하기 위해 섬이나 바닷가의 백성들에게 뱀을 공물로 받았다. 산 채로 잡지 않으면 약으로 쓸 수가 없다. 일반 백성이 뱀을 쉽게 잡을 리 없다.
결국 돈을 주고 땅꾼에게 사야 하는데, 뱀 한 마리 가격이 서너 냥으로 쌀 두 가마 값이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게다가 진상 받는 관리들이 크기가 작다고 퇴짜를 놓으니 뇌물도 주어야 한다. 사유환은 변질되기 쉬워 1년 이상 보관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매년 뱀을 잡느라 고역을 겪었다.
사유환은 의학서에도 없는 민간요법에 불과했다.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사실은 조정 관원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계속 진상을 받았다. 뱀의 효능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은 민간에도 만연해 있었다. 환자에게 뱀을 잡아 먹였다는 기록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다산 정약용이 경북 장기(포항)에 유배되어 풍속을 살펴보니, 그곳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무당에게 빌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뱀을 잡아먹었다. 다산은 집에서 보내준 의학서에서 간편한 처방을 뽑아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책을 엮었지만 뱀을 잡아먹는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정관해는 ‘관란재일기’에서 한 땅꾼의 기구한 인생을 소개했다. 땅꾼은 어릴 적 회초리 맞기가 싫어 가출했다.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됐다. 이후 9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더니 부모가 억지로 결혼시키려 했다. 그는 두 번째 가출을 감행했다. 구속이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거지 노릇을 하던 그는 땅꾼이 되었다. 땅꾼은 뱀을 찾아 방방곡곡을 누벼야 한다. 한자리에 머물러 살 수 없는 것이 땅꾼의 운명. 천대받았지만 자유로운 직업이었다. 어쩌면 땅꾼은 천직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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