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6.26 팀 알퍼 칼럼니스트)
수십 년씩 방영되는 英 드라마… 대도시 빈곤층·농민의 현실을 불편하더라도 적나라하게 묘사
韓 드라마는 질투·음모 등 원초적 인간 심리에 호소… 해외서도 통할 요소 적지 않아
팀 알퍼 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케이블 수백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게 되었다.
이 드라마는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하이킥을 처음으로 방송하던 때는 내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12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당시 방영하던 한국 드라마의 영상은 오래된 캠코더로 촬영한 듯했다. 하지만 이제는 스페인 등
해외에서도 촬영하고 고화질 영상으로 촬영한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할리우드의 스튜디오가 부럽지 않게 보일 정도이다.
2007년에 유럽인들이 한국 드라마에 관심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아마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동유럽권 주요 방송사는 앞다투어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제작 예산이 늘어나
한국 드라마 완성도가 계속 향상된다면 해외에서 더 많은 러브 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가 진화를 거듭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한 가지가 바로 스토리다.
아침 드라마에는 대개 불우한 처지이지만 도덕군자 같은 성품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이 너무 완벽해
다소 따분하게 느껴지는 반면 조연 캐릭터들은 흥미진진하다.
잘생기고 순수하지만 다소 덜떨어진 듯한 재벌 왕자님은 신데렐라의 매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에 반기를 든 시어머니는
질투와 적대감으로 똘똘 뭉쳐 사악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신데렐라의 이복 언니쯤에 해당하는 주변 인물이
콧김을 내뿜으며 헛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
나의 고국 영국 드라마는 완전히 다르다. 만약 영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이 '영드'라고 생각하는 '셜록'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등은 영국 배우와 영국 제작진이 만들었지만 스타일이나
내용 등은 100% 미국인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 것이다.
영국인들에게 진짜로 인기 있는 드라마는 영국적 색채가 강하고 장기간 방영하는 특징이 있다.
영국의 '빅3'로 꼽히는 드라마는 '코로네이션 스트리트(Coronation Street)' '이스트엔더스(EastEnders)'
'에머데일(Emmerdale)'이다. 이들은 각각 1960년, 1985년, 1972년부터 아직까지 꾸준히 방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국 드라마들은 한국과 미국의 시청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영국 드라마들은 런던·맨체스터 같은 대도시에 사는 빈곤층이나 가난한 농촌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두고 불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등장인물은 주로 점원이나 시장 상인 또는 식당 종업원이다.
연기자들이 성형외과에서 걸어 나온 듯한 용모를 뽐내는 한국 드라마와는 다르게 영국의 연기자들은 시급히 성형외과를
방문해야 할 듯이 보인다. 영국 사람들은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생긴 보통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나는 비현실적이고 뻔한 한국 드라마가 참을 수 없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때 끔찍이 싫어했던 한국 드라마들이 갖는 정형화한 공식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출생의 비밀에 대한 끊임없는 음모, 히스테리에 가까운 시어머니나 계모의 질투, 나는 이런 요소가 원초적 인간 심리에
호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맥베스 아내처럼 내재한 광기를 몰아 악행을 서슴없이 일삼는
악인,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처럼 비밀에 싸인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운명을 개척하는 주인공….
이렇게 한국 드라마에는 사람들이 결코 질리지 않을 요소가 가득하다.
저녁 드라마는 백설공주나 개구리 왕자와 비슷한 경향이 있다. 현실에서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커플이
온갖 난관과 장애물을 극복해내고 마지막 회에서 서로 팔에 안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수많은 장애물,
난관을 겪게 되지만 결국은 다시 결합해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기본 줄거리는 러브 스토리를 쓰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꾼의 기본 줄거리가 되어왔다.
거기에 당대의 인기 스타들과 유행하는 의상, 현대적 배경 등 몇 가지 요소를 더해서 업데이트한 버전을 우리는 아마도
1000년 뒤인 3018년까지도 재미나게 시청하고 있을 것 같다. 한국 드라마가 이렇게 계속 인기를 유지한다면
미래의 서양인들은 '할리우드 엔딩'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 엔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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