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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샤갈의 눈썰매

바람아님 2018. 8. 6. 09:19
[중앙선데이] 2018.08.04 01:00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샤갈은 자신의 조국 러시아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다. “러시아에는 색채가 없다”던 그에게 파리는 “예술의 태양이 뜨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러나 그는 고향인 러시아 서부의 작은 도시 비테프스키를 늘 그리워했다. 그의 작품 ‘러시아 마을’은 아마도 한겨울 비테프스키의 풍경을 재현한듯하다. 그의 말대로 눈 덮인 러시아 마을은 “색채”가 별로 없다. 좌우에 서 있는 두 가옥의 벽을 적색과 청색으로 칠했지만, 밝고 화려한 색채의 폭발 같은 샤갈의 그림들을 염두에 두면 이 색깔들은 (상대적으로) 우울하고 칙칙한 느낌을 준다. 인적이 전혀 없는 단순한 구도의 거리엔 눈이 덮여 있고, 썰매를 탄 한 사내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어둡고 칙칙한 하늘을 대각선으로 날아가고 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엇을 찾아,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샤갈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짝을 이루고 있다. 가장 흔한 것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연인 혹은 부부의 모습이다. 그의 그림엔 시도 때도 없이 부부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말해 샤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1차대전 발발 직후에 그는 결혼했고, 1944년 아내 벨라가 급성 간염으로 갑자기 사망한 후 9개월 동안 모든 그림들을 벽으로 돌려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와 함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들이 스며들어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내 그림을 이끌며 나의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부인이 “예스”라고 말하기 전엔 자신의 그림에 결코 사인을 하지 않았던 샤갈이다. ‘러시아 마을’이 1929년, 그가 결혼한 후 근 15년이 지나서 그린 그림임을 생각하면, 이 그림은 아직 사랑의 ‘색채’가 없던 청년기의 자신을 회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눈썰매를 타고 그는 아직 오지 않았던 사랑을 찾아 우울하고 칙칙한 러시아의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향기 8/4

삶의 향기 8/4

 
샤갈의 그림들이 분방한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림이 만인의 언어인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삶이 종말을 향해 움직인다면, 살아있는 동안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했다. 현대 철학을 주도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상가들―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등 ―의 공통점은 플라톤 이래 인류가 생산해낸 모든 규범과 권위와 대문자 진리(Truth)를 회의하며 해체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견고하고 절대적인 것’들은 이들에 의해 사실상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 그 누구도 유일한 진리, 고정불변의 진리를 함부로 언급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 철학의 저변에서 ‘해체 불가능한’ 어떤 것에 대한 사유들이 다시 출현하고 있음을 본다. 낭시, 레비나스, 아감벤, 이글턴 같은 이론가들의 ‘신학적 전회(轉回)’가 그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해체해도 궁극적으로 해체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의 개념이다. 해체주의의 기수인 데리다가 후기에 ‘환대’의 철학을 논한 것도 이런 맥락이고,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이글턴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사건을 “신성한 테러”라고 부르며, 그 사랑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랑에도 두 가지 층위가 있다. 개인적 사랑과 사회적 사랑이 그것이다. 사랑은 이 두 층위를 가로 지르며 배열되고 조합된다. 이들은 서로 길항(拮抗)하고 보충하며 완성을 향해 간다. 이 중 어떤 것이 배제될 때, 사랑은 힘을 잃거나 위험한 에너지로 전락한다. 사랑은 관계의 확산이고, 확산은 늘 ‘공통적인 것’을 향해 있다. 합하여 공통적인 것을 두루 잘 만들어가는 개체들이 진정한 사랑의 주체들이다. 샤갈의 눈썰매는 거기, 어디쯤 날아가고 있을까.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