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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물줄기 잇는 조선 중기 물자 집산지, 남은 건 희미한 이름뿐

바람아님 2018. 9. 25. 07:30

(조선닷컴 2017.04.20 노은주·임형남 가온 건축 공동대표)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서울 '옥수동 두모포'


/그림=임형남


나는 서울 지하철 노선 중 경복궁, 안국동, 종로, 을지로를 거쳐 양재 쪽으로 운행하는 지하철 3호선을 가장 많이 이용한다.

대부분 컴컴한 지하로 다니는 3호선에서 유일한 낙은 압구정역과 옥수역 사이에 잠시 지나치는 한강 풍경이다.

1킬로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지만 한강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막힌 속이 다 뚫리는 듯 시원하다.

특히 개나리가 피어나서 옥수동 두 봉우리가 노란색 페인트를 끼얹은 것처럼 생생하게 물드는 봄, 옥수동 경치는 정말 좋다.

그때는 지하철에서만 보기 아쉬워 아예 바깥으로 나가 그 풍경을 실컷 감상하기도 한다.


동호대교에 바짝 붙어있는 동네 옥수동이 예전에는 커다란 포구였다는 건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은 조선 후기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 복사본을 들여다보았다.

지도 아랫부분에 한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고 우측으로 한강진이 있고 그 옆에 옥수동 자리에는 '두모포(豆毛浦)'라고

쓰여 있었다.


콩 두(豆)자와 털 모(毛)자로 이루어져서 동네 형상에서 유래한 것인가 생각하곤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데,

그건 두뭇개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옮기며 만들어진 이름이라 하여 싱겁게 상상을 내려놨다.

두뭇개라는 것은 두 물이 만난다는 의미인데 이 부근에서 의정부 쪽에서 흘러온 중랑천이 태백산에서부터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한강과 만난다.


밖에서 보면 옥수동이 지금은 산과 아파트와 개나리밖에 없는 단조로운 동네이지만 전성기에는 인구 4000명이 넘는

'잘나가는' 동네였다고 한다. 그때가 조선 중기 이후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수상 운송이 물자 운송 수단 가운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때였고 한강은 서울로 드나드는 고속도로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삼남 지방 농산물과 황해안 수산물은 한강 하류부터 운송되어 서강, 마포 용산에 내려졌고,

강원도 산간 지방의 임산물은 뗏목이나 배에 실려 뚝섬, 노량진 등에 풀어놓았다.

특히 황해, 충청, 전라도에서 들어오는 곡식은 해선을 통해 운반하여 한강으로 들어와 지금 마포의 광흥창이나

풍저창에 보관했다.

이때 두모포는 조선 중기 이후에 고추, 마늘, 감자 같은 먹을거리와 목재 땔감 등 각종 물자의 집산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배경 말고도 이곳이 유명했던 것은 아주 수려한 풍광 때문이라 한다. 당시는 두포모 앞 물을 동호(東湖)라고

불렀는데(물론 동호대교라는 다리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도성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호로 부른 것이다.


이곳 풍광은 70년대에 현대건설에서 건너편 압구정동 등 강남을 개발할 때 흙을 퍼가며 없애버린 저자도와 응봉과

깎아지른 절벽이 멋있는 입석포가 어우러져 만드는 경치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명망가 심지어 왕까지

정자를 만들고 경치를 즐겼는데,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만든 유하정과 연산군이 만든 황화정이 유명하다.


저자도는 한강에서 없어진 많은 섬 중에서도 대표적 섬일 것이다.

서강 쪽에 있는 밤섬도 그와 비슷한 운명이었는데, 그곳도 예전에는 인구가 꽤 많았던 큰 섬이었다.

그러나 여의도를 개발할 때 밤섬 흙을 퍼가며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제 그 섬은 쪼그라든 채 철새들이 노니는 곳으로 희미하게 남아있다.

또한 잠실 개발할 때 없어진 잠실도와 부리도 역시 비슷한 운명이었는데 그곳은 남쪽에 접한 육지와 붙어버렸다.

그 섬들이 둥둥 떠 있었던 한강 풍경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과 아주 달랐을 것이다.


두모포 앞 저자도는 종이 재료인 닥나무가 무성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 섬은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며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섬이었는데, 백사장이 훌륭하고 풍광이 좋아 선비들의

별서가 즐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자취도 없고 이름도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저자도가 이름도 남아있지 않는 반면 끈질기게 이름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

두모포에 설치했던 독서당이라는 시설인데, 이곳은 관료들에게 일정 기간 독서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독서당에 들어가려는 경쟁이 무척 치열했는데, 우리가 아는 조선 중기의 많은 학자가 이곳을 거쳤다.

특히 율곡 이이가 이곳에서 독서와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로 제출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동호문답'이라는 정책 제안서이다.


독서당 제도는 세종대에 만든 사가 독서 제도에서 유래된다.

그 취지는 재주가 있는 젊은 관료를 뽑아 사가(賜暇·휴가를 줌)하여 지정된 절에서 공부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후 세조 때 제도를 없앴으나 성종 때 다시 복구하였다. 또한 중종 대에는 두모포로 독서당을 이전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졌고 여러 번 중수한 끝에 결국 이름만 그 근방 주소로 남고 없어지게 되었다.


옥수동 두모포는 강 건너에서는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봉긋한 두 봉우리와 그 아래로 모이는 두 물줄기.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다만 남아있는 것은 희미한 이름과 애써 기억해내는 예전 역사뿐이다.

지하철로 한강을 건너며 개나리와 사라진 두모포, 저자도를 눈과 상상으로 만나는 2분 기행은 짧고도 꿀처럼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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