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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민주주의는 이렇게 조용히 시들어간다'

바람아님 2018. 10. 13. 07:44

(조선일보 2018.10.12 강천석 논설고문)


강천석 논설고문권력에 쫓기던 사람들 권력 쥐고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나
대통령·현직 대법원장 검찰·권력 代辯 언론의 拍子 맞춘 사법부 공격


강천석 논설고문


묵은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다 접힌 페이지를 열었더니 시(詩) 한 편이 튀어나왔다.

인쇄 잉크조차 날아가 버려 글자가 흐릿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대협 출신의 지금 청와대 유력(有力) 인사들은 이 시가 눈에 설지 모르겠다.

그러나 1960~1970년대에 뛰던 '운동권 삼촌' '운동권 할아버지'들은 이 시를 아꼈다.

유신 헌법 반대 운동으로 쫓기던 시절 이 시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이 시의 지은이는 목사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1892~1984)는 전 독일 교회가 히틀러 앞에 무릎을 꿇었던 암흑시대에

'히틀러 불복종(不服從) 운동'을 이끌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1938~1945년 유태인 학살로 악명 높은

다카우 수용소에 감금(監禁) 됐다. 히틀러가 독일 정계에 떠오를 무렵 그는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다.

훗날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뉘우쳤다.

"나라는 혼란스럽고 무신론을 내건 공산주의자들이 득세(得勢) 했다. 그 상황에 갇혀 나는 히틀러의 '말'을 믿었다."

히틀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봐야 했다는 후회(後悔)다.


이 나라에서 과거 수사기관에 쫓기던 사람들이 수사 기관을 동원해 누군가를 '덮치고' 누구를 '가두는' 권력을 장악했다.

'쫓기던' 사람들이 '쫓는' 자리에 올랐으니 세상이 바뀌었을까.

농림수산검역본부·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교육부·법무부 이민특수조사대·국토교통부·관세청·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

경찰·검찰등 14개 기관이 지난 4월 이후 한 가족을 뒤져왔다.

'거국일치(擧國一致) 수사체제다.' 땅콩과 물컵을 던지고 화분을 걷어찬 모녀(母女)의 비행(非行)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어느 국민도 이 딸과 어머니를 두둔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법치(法治)가 아니다. 법치 이전(以前)이다.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 정의를 드러내야 한다.

공정하고 정의가 실현되도록 재판을 이끌려면 재판 당사자들이 '진실의 전모(全貌)'를 밝히는 데 협력해야 한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형사재판 변호사-특히 죄가 있는 피고인을 변호할 경우-는 모든 합법 수단을 동원해 진실 전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막는다.

기소한 사건의 유·무죄 여부로 성적을 평가받는 검사는 어떻게든 유죄 선고를 얻어내려 한다.

판사의 최우선 관심사는 상급심(上級審)에서 자신의 판결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의 관건인 '진실의 전모'를 돌보는 이는 없다.


재판은 유죄 아니면 무죄, 승소 아니면 패소로 결판난다.

재판 관련자의 절반이 재판 결과에 승복(承服) 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재판 구조와도 얽혀있다.

재판 불신은 법원 불신으로 이어진다. 2017년 한국행정연구원 기관 신뢰도 평가에서 법원은 32%로 경찰보다도 못했다.

어느때보다 또 누구보다 판사의 근신(謹愼)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전임 대법원장이 이끌던 사법부의 상고(上告) 법원 설치 집착(執着)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 최고 법원 위상(位相)을 놓고 헌법재판소와 벌인 경쟁이 깔려 있었다는 점에선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렇다 해도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사법부 비판의 전면(前面)에 나서고,

그 말에 현직 대법원장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검찰은 전직 대법원장·대법관에 대한 파상적(波狀的) 영장(令狀) 공세를 퍼붓고,

정권 대변 언론들이 '재판 거래'라고 박자(拍子)를 맞추는 사태 역시 정상은 아니다.

박자가 너무 맞으면 부자연스럽고 부자연스러우면 의혹을 낳는다.


민주주의는 요란한 굉음(轟音)을 내며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영토는 야금야금 잠식(蠶食) 되고,민주주의라는 연약한 나무는 소리 없이 시드는 법이다.

다시 시(詩) 한 편. 이 시는 목사가 아니라 시인의 작품이다.

"물론 난 잘 안다./순전히 운이 좋아/그 많은 친구들과 달리 내가 살아남았다는걸…"

1930년대 히틀러 앞에서 법원을 시작으로 모든 권위가 붕괴돼버린 황무지(荒蕪地)독일 풍경이다.